최근 수정 시각 : 2022-04-13 22:51:55

최익현(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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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행적3. 평가4. 기타

1. 개요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의 등장인물이자 근대화를 진행 중인 대한제국의 구세대의 상징 계층인 유림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2. 행적

독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유림계의 최종보스, 내일 죽어도 오늘 공자왈 맹자왈할 유림계의 독종 등등으로, 처음에는 개혁에 반대하여 상소문을 올리는 것으로 간간히 등장했다. 이 상소문의 여파로 이하응이 잠시 실각(을 빙자한 휴가)을 하기도 했으나[1] 그 후로는 웬일인지 조용했는데… 알고 보니, 상소문을 꾸준히 올리고 있었으나, 그 내용이 쌍욕에 가까운 모욕들로 가득해 폭군이 아니더라도 목을 칠 만한 것들이라서 최익현을 존경하던 조정 관료들이 몰래 상소문을 치워버렸던 것.

다만 우연히 이형의 눈에 이 상소문이 들어가게 되자 모든 관료들이 최익현이 죽을 것 같다는 예감에 저마다 마음 속으로 충신에 대한 조의를 표했으나, 이형은 딱 자신이 생각해봤던 사회 내부 저항방식이라서 오히려 악플 감상하듯 즐겁게 읽으며 최익현의 다른 상소문까지 가져오라고 하여 꼼꼼히 읽어본 뒤, 최익현을 비롯한 언관을 모아 내수사에 대한일보를 창간시켜 편집장 자리를 맡기게 된다. 여담으로 영광스러운 조선 첫 대중적 및 어용신문[2]의 창간호 제1면이 다름 아니라 1871년(고종 7년)부터의 서력과 양력 도입 및 연호와 음력 폐지에 대한 언관들의 무지막지한 디스 세례였다.[3]

이로 미루어 보아 급진적인 개혁으로 불만이 쌓여있을 구세력의 불만 해소구로서 대한일보를 만들고 그 구세력의 상징격인 최익현을 자리에 앉혀놓은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현재만이 아닌 먼 미래를 보고 계산한 수다. 이형 본인이 언젠가는 노망나서 미친 광군이 되거나, 이형의 후대가 암군이 나오는 경우를 대비한 견제수단이 필요하다.

사실 신권에 가까운 수준의 지지자를 가진 절대군주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준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형은 원치 않았는데도 급격하게 효과를 보게 되었다. 영국의 강남 쌀값 조작 사태가 일어나면서 동아시아 전체가 대전쟁에 휘말릴 위기가 몰려오고 영국인들은 아시아의 공적이 되어서 한국군이 그들을 보호해줘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최익현이 아시아인들이 영국에 대한 분노를 부풀리는데 크게 일조한 것이다.[4] 실제로 소문을 접하자마자 곧바로 대한일보 1면에 이 사실을 올려서 전국에 퍼뜨렸고 이에 이형 즉위 이후 처음으로 민초와 유림의 여론이 일치하는 상황을 만들어서[5] 유림들이 한양 도성까지 와서 상소를 올리는 일이 일어난다.

이후, 종교의 자유[6]에 대한 이형의 발언을 신문에 게재하여 유림들의 자발적인 개화 참여를 유도하는 등 의도치 않게 이형의 정책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인간은 어디까지나 신문장으로 앉혔는데 하는 걸 보면 그걸 상소용으로 쓰고 있다.[7]

그리고 얼마 뒤, 이하응이 대만의 자영농들의 땅을 빼앗아 부정축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3. 평가

자기 나름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보통이 아닌데, 대만에서 자영농들의 땅을 수탈한 꼴이 된 이하응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전국 유림에 퍼트리려던 박규수, 정확히는 황후가 자신의 강직함을 이용해 먹으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침묵한 것. 그렇지만, 황후의 뒷공작에 의해 이하응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이 자연스럽게 퍼지게 되자 유림계의 최종보스로서 이를 방관할 수 없었기에 결국 대한일보에 게시하는 사설 형식으로 이하응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린다.

허나 어디까지나 한문을 사용하는 유림 한정인지라 민초들에게까지는 별 영향력이 없는 걸로 보인다. 특히, 이형에게는 종교의 자유 선포 등 까먹었다 싶은 걸 지적해줘서 오히려 바라던 대로 된 적이 없다. 거기에 신문의 문체가 너무 근엄한데다 한문으로만 쓰여져서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기껏해야 유림들이나 사서 읽는 정도라고. 물론 이 정도로도 이형이 생각한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유림 입장에서는 이 신문을 읽어 나름대로의 배출구를 마련하고 이형 입장에서는 이 폭발할 지도 모를 유림들이 안 폭발하게 조율할 수 있으니 나름대로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 그러면서도 유림들의 사상이 다른 쪽으로까지 번지지 않으니 더 좋고.

게다가 사고방식이 워낙 전근대적이다 보니 이형에게 시대에 역행하는 인물로 평가되어 지금 이상으로는 큰 일을 맡진 못할 듯하다. 황태자의 스승인 태자태사도 김홍집에게로 넘어간 것은 덤이고.

4. 기타

원래 역사에서도 최익현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세도 가문 축출에서 더 나아가 노론을 견제하고자 남인, 북인 등까지 기용하고,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 서원 철폐 등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치에 반감이 있었기에 가장 앞에 서서 그를 공격했던 인물이었다. 여기에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맞물렸던 명성황후와도 제휴가 되어 있었던 건 덤.

그렇지만, 이 세계선에서는 흥선군은 귀엽게 보일 정도로 무지막지한 극렬 개화파 폭군 패왕이 안에서는 유림과 관료들을 복날 개 패듯 때려잡고, 밖에서는 친정을 나갈 때마다 승전보와 함께 돌아오며, 그런 그의 부인 만주족 출신의 황후이다. 이 때문에 원래 역사보다는 다소 사리는 수준.

보수적인 성향을 보고 작중 초기 시점부터 최익현이 노인을 연상하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사실 무술대회 열리는 시점에서 그의 나이는 고작 30대 후반이다.


[1] 그 원인은 이하응이 을축토지개혁과 병인군제개혁에 반발한 8천 명의 선비들을 죽였음에도 이하응이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기득권인 양반들을 두들겨 패서 그것으로 얻어낸 이득들을 평민들에게 돌린 덕분에 평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서 그들에게 섭정공이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니 그렇다. 그리고 이하응은 그 해를 넘기기 전에 복귀한다. [2] 조보라는게 있긴 해도, 이건 어디까지나 관보의 성격이 강한 신문이라 대중적인 신문이라 하기는 힘들다. 물론 민간에도 꽤나 풀렸지만 이는 몰래몰래 빼돌려서 사적으로 인쇄한 것이라 엄연한 불법매체였다. [3] 아닌 게 아니라 어용신문이 창간하자마자 국가 정책을 디스하는 꼴이 되니 참 아이러니하다. [4] 마침 최익현이 농업천하지대본 사상의 영향으로 민생 안정을 영원한 성전으로 여기는 유자니만큼 영국인들의 행태는 기가 막히다 못해 분노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하다 못해 그 사태가 가뭄이 들었을 때에 일어났다면 모를까 풍년이 들었는데도 그랬으니 영국인들을 금수 취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놀랍겠지만 이형으로부터 세왕 전 순조때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단, 이때는 수도 한정으로 일어난 것이고 단지 쌀값이 떨어졌는데 그걸 끌어올리기 위해 농간을 쳤다는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최익현 입장에서는 이보다도 영국을 물어뜯기 좋은 기회가 없다고 생각할 만하다. [5] 민초 입장에서는 식량 가지고 장난질치는 영국이 고울 리가 없고 유림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심지어 유림들은 서구를 배척하는 성향이 강하니 이보다 좋은 명분이 없다고 생각할 만하다. [6] 유림들은 괴력난신을 굉장히 싫어하지만 천주교는 이형의 생모인 부대부인 민씨가 믿으니까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이형을 패륜아로 만들 수 있으니 천주교 박해 금지는 어쩔 수 없이 넘어간다손 치더라도 불교는 전신 왕조인 고려를 멸망시킨 제1 원흉으로 여기고 있기에 유림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형이 티벳 불교 신자인 황후를 위해 불교 박해까지 금지해버렸기 때문에 이형에 우호적인 박규수마저 "황상께서 불씨잡변에 관심이 있나봅니다?"라고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을 정도다. [7] 그리고 신문은 항상 "삼가 아뢰옵니다."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