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d400><colbgcolor=#330066> | |
|
|
본관 | 화순 최씨 |
출생 | 1855년 8월 29일 |
경상도 김산군 군내면 문리 (現 경상북도 김천시 지좌동) |
|
사망 | 1939년 8월 17일 (향년 83세)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김천군 (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김천시) |
|
묘소 | 경상북도 김천시 부곡동 산 96-8[1] |
성별 | 여성 |
<colcolor=#ffd400> |
최송설당 초상화[2] |
[clearfix]
1. 개요
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길이 사립학교를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一人定邦國 一人鎭東洋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克遵此道 勿負吾志
마땅히 이 길을 따라 지키되,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최송설당의 유언이자 건학이념
길이 사립학교를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一人定邦國 一人鎭東洋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克遵此道 勿負吾志
마땅히 이 길을 따라 지키되,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최송설당의 유언이자 건학이념
일제강점기의 교육인이자 재단법인 송설 학원의 설립자이다.
2. 생애
최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은 아버지 최창환(崔昌煥)과 어머니 정옥경(鄭玉瓊)의 무남 삼녀 중 장녀로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송설당의 집안은 증조부의 외가 강릉 유씨(劉氏)가 홍경래의 난에 가담하고 증조부가 무관으로서 평안도 선천군이 함락되었을 때 대항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옥사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몰락하기 시작했다.송설당은 어려서부터 서당 훈장인 부친에게 한글과 한문을 배워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으며, 이후 좋은 아들을 낳아 가문의 원한을 풀겠다는 부친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갖 고난을 마다않고 재산을 모으는데 주력하여 상당한 재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조상의 한을 푸는 것이 돈만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낀 그는 이용교(李瑢敎)와 결혼하여 한양에 입성한 뒤 고종이 총애하는 엄비의 신임을 받아 당시 왕세자였던 영친왕의 보모가 되어 입궁하였다. 그리고 이용교는 창녕군수, 김해군수를 거쳐 진주목사에 오른 뒤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였다.
이후 엄비와 고종에 대한 지극한 충성으로 두터운 신임을 얻은 그는 1901년 고종에게 조상의 신원(伸寃)을 상소하여 그해 11월 몰락한 가문의 복권을 이루었다. 1907년 말이나 1908년 초 출궁한 것으로 보이는 송설당은 가문의 복원으로 엄연한 사대부 여인이 되어 권문세가 사대부들과 교제하며 종친회를 열고 조상의 묘역을 정비하는 등 가문의 재건을 위해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치산에도 더욱 힘써 왕성한 사회사업을 하는 가운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김천고보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22년에는 당대 유명 인사들의 서문과 발문을 겸하여 『송설당집(松雪堂集)』을 손수 발간하였는데, 여기에는 한시 총 167제 242수, 가사 50편이 실려 있다. 이런 문집 발간 취지에 대해 송설당은 “지은 바 문고(文稿)가 이같이 얼마 안 되나 쉽게 버리지 못하고 엮은 것은 뒷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비취새가 그 깃을 사랑함과 같음에서였다.”라고 하였다.
후에 김천에 귀향해서 원래 불교 사업에 전재산을 기부하려 했지만 육영사업에 투자하라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의견을 따라서 자신이 모은 전재산을 육영사업에 쓸 것이라는 뜻을 전국적으로 밝히고, 1931년 재단법인 송설학원을 설립, 김천고등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건학이념은 "사립학교를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잘 교육받은 학생 한 사람이 동양을 진압할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지키되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一人定邦國 一人鎭東洋 克遵此道 勿負吾志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