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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월 29일, 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최세필(崔世必) |
출생 | 1911년[1] 1월 13일 |
경상남도
부산부 사중면 초량동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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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학력 |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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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최복순은 1911년 1월 13일 경상남도 부산부 사중면 초량동(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한의사였던 아버지 최군천(崔君天), 어머니 정인숙(鄭仁淑)의 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 최석봉(崔錫鳳)이 있었다. #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현저동(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백명진(白明鎭)의 집에서 하숙하였으며,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광주학생항일운동 소식을 전해들 은 그녀는 1월 9일에 동급생 최윤숙(崔胤淑)·김진현(金鎭賢)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최복순은 당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기독교청년회(基督敎女子靑年會)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근우회(槿友會) 서무부장이었던 허정숙과 광주학생운동의 동조시위를 주도하였다.
최복순 등은 1월 12일 최윤숙의 집에 모여, "학교는 경찰의 침입을 반대하라, 식민지 교육정책을 전폐시켜라, 학생 희생자 모두를 석방시켜라, 조선 청년 학생이여, 아아, 일본의 야만정책에 반대하자, 각 학교의 퇴학생을 복교시켜라" 등 6개 항목을 결의하였다. 각 학년 간의 단결을 위해 학년별로 본부를 정하여 상호 연락을 취했는데, 최복순은 4학년 본부를 맡았다. 또한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 등 서울 시내 각 학교와 연락을 취하고 격문과 태극기를 준비했다.
1930년 1월 15일 이화여고보 교정에서 3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학교 밖으로 나가 타교생들과 함께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계속하려다가 저지당하고 학우 약 50명과 함께 당일 경성부 서대문경찰서 소속 일본 경찰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녀는 1930년 3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당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
(좌측) 1930년 3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우측) 1931년 8월 30일, 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서 촬영. 우측의 사진은 |
1930년 9월 10일 가출옥하였으며, 같은 달 13일 부산부 초량정의 본가로 귀향하였다. #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최복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8년생으로,
1931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