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6 09:09:33

최만현



파일:금속공업부장 최만현.jpg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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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2. 생애

1918년 12월 6일에 태어났다.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전에부터 제강주식회사에서 제강기사로 일한 식민지 인텔리 출신이다. 북한에서도 그가 자산계급 출신이며 일제에 복무했다고 2023년 1월 26일자 기사를 통해 인정했다. 해방 이후 북조선공산당에 가입, 1946년 1월 김일성을 직접 만나 과거는 신경쓰지 말라는 말을 듣고 북한에서 계속 사업하게 되었다. 해주제강소 지배인, 성진제강소 지배인을 거쳐 1954년 10월, 국가계획위원회 종합계획 부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 중에는 '일부 편협한 자'들로부터 자산계급 출신인 당신은 가버리라는 폭언도 들었지만 끝까지 후방으로 후퇴하였다.

1961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65년까지 재임했다. 흑색금속관리국 국장,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다가 1973년 10월, 과학원 부원장에 임명되었고 1978년 2월 17일, 평성에서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2.17과학자기술자돌격대를 조직하여 대장이 되었다. 1979년 10월, 정무원 국가과학기술위원장이 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81년 3월 공업기술총연맹 위원장이 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정무원 금속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1984년 10월, 금속공업 대표단장으로 동독과 불가리아를 다녀왔으며 1986년 3월, 금속공업부가 기계공업부와 합쳐지면서 금속-기계공업위원회가 출범하자 금속-기계공업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87년 4월, 김일성 75세 생일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7년 10월 14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금속 및 기계공업위원회가 금속공업부와 기계공업부로 도로 분리됨에 따라 금속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1988년에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88년 3월, 금속공업대표단장으로 소련에 다녀왔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다시 금속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8월에 금속공업대표단장으로 쿠바를 다녀왔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12월 11일, 최고인민회의 9기 4차 회의에서 최영림에게 금속공업부장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했다. 하지만 숙청은 아니었는지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자리를 유지하면서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정책위원회 참사로 일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을 지내고 한달만[1]인 1994년 8월 20일, 5시 45분에 75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나는 오직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만을 믿고 따랐다.그 누가 나의 과거가 어쩌고저쩌고하며 무엇이라고 해도 나는 이 한길로만 변함없이 걸어온것으로 해서 아주 떳떳하다.오직 하나 자기 수령만 믿고 따라야 한다는것, 이것이 아버지로서 로동당원들인 너희들에게 넘겨주는 유산이다."라고 유언했다 카더라.

당중앙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다년간 중앙과 지방의 여러 단위의 중요한 직책에서 사업하면서 우리 당이 제시한 경제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자기의 정력과 지혜를 다 바쳤으며 나라의 금속공업을 발전시키고 자립적민족경제를 건설하는데 적극 공헌하였다. 동지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하였다."라고 좋게 평가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정책위원회 참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2023년 1월 26일자 로동신문은 <우리 국가의 발전행로에 뚜렷한 자욱을 새긴 충신, 애국자들: 나라의 금속공업발전에 크게 공헌한 일군 -전 금속공업부장 최만현동지>란 기사를 써서 최만현의 생애를 기렸다.

3.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1] 그래도 김일성 사망 당일에 사망한 조명선보다는 상황이 좀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