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40001><colcolor=#FED11E>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최고려 崔高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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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3년 |
러시아 니콜스크-우수리스크 | |
사망 | 미상 |
USSR |
1. 개요
한국의 항일운동가.2. 생애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치타사범학교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이 부족해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그는 한인 망명객들의 잡지인 대한인정교보에 관계하게 되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1912년 일본 총리였던 가쓰라 다로가 그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로 갈 때 러시아 관헌에 붙잡혔었다.[1]
1913년 연해도로 돌아와 시골학교 교사를 맡으면서 지하독립조직에 가담하게 되었다. 1920년 3월 알렉셈프스크에서 흑룡주 한인총회가 조직되고, 동시에 군대모집에 착수해 약 400명의 1개 대대를 단시일 내에 편성하게 되었는데,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한인보병자유대대로 명명하게 됐다.
그는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인 문창범을 의장으로 하는 대한국민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이 대대의 군정위원장으로 배치되었다. 대대장은 소련의 군인인 오하묵이었다. 최고려는 1920년 6월 러시아공산당원이 되었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제1차한인공산주의자대회에서 세칭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결성될 때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당시, 그는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 만년에는 레닌이념의 선전에 투신했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인학교를 위한 교과서편찬과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번역했다.
[1]
한인들의 독립 테러리즘을 예방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