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恩寺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두타산(頭陀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에 속하며 월정사의 말사이다. 구례에도 동명의 사찰이 소재한다.
신라 경덕왕 17년( 758년)에 인도에서 용(돌로 만든 배라고도)을 타고 온 '두타삼선(頭陀三仙)'이라 불리는 세 명의 승려가 두타산의 네 모퉁이를 돌며 연꽃 한 송이씩을 가지고 절 지을 자리를 잡았는데, 푸른 연꽃을 가지고 동쪽에 지상사(池上寺)를, 금색 연꽃을 가지고 남쪽에 영은사(靈隱寺)를, 검은색 연꽃을 들고 북쪽에 삼화사(三和寺)를[1], 흰 연꽃을 가지고 서쪽에 백련대(白蓮臺)를 지었다고 한다.
천은사라는 이름은 백련대>간장사>흑악사를 거쳐 붙여진 이름으로, 사찰의 역사에 비해 그 유래가 얼마 안 된다. 광무 3년( 1899년) 태조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아버지, 즉 태조의 현조부인 이양무(李陽茂)의 묘소가 어디인지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이양무와 그 부인 삼척 김씨의 무덤을 비정해 수축하고 각각 준경묘와 영경묘라 불렀으며, 나아가 이 절을 준경묘와 영경묘 제사에 쓰일 두부를 만드는 조포사로 삼으면서 당시 영건청당상관 이중하(李重夏)에 의해 '천은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 그 전까지는 흑악사(黑岳寺)라고 불렀는데, 1598년에 서산대사가 이 절을 중건하면서 서남쪽의 봉우리가 검푸른 것을 보고 '흑악사'라고 부른 것이다. 숙종 32년(1706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 이듬해 중건되었으며, 순조 31년(1831년)과 헌종 7년(1837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흑악사 이전에는 간장사(看藏寺)라고 불렀는데,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이승휴(李承休)에게서 비롯되었다. 이승휴는 이곳에 들어와서 지금의 천은사 경내에 용안당, 지락당, 보광정, 표음정 같은 부대시설을 짓고 머물렀으며, 삼화사에서 대장경 1천 권을 구해 읽으면서 자신의 처소를 간장암(看藏庵)[2]이라 칭했다. 나이 71세 되던 1294년에 그가 머무르던 용안당(容安堂)의 현판을 내리고 이름을 간장사로 바꾸어 사찰로 희사했으며, 자신의 전답 등을 시주했다고 한다. 이승휴의 유명한 저술 제왕운기가 저술된 것도 이 절이 있는 용계(龍溪)에서의 일이다. 충숙왕 9년(1322년)에도 이승휴의 맏아들 이임종(李林宗)과 승려인 차남 담욱(曇昱)이 중수하였다고 하니 이승휴의 집안과도 연고가 깊었다고 할 수 있다. 제왕운기가 집필된 장소라는 인연으로 1995년에 이승휴를 기리는 사당 동안사(動安祠)가 세워졌으며, 2000년에 '사적 이승휴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10월 3일이면 동안사에서 동안대제라는 이름으로 이승휴에 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천은사 극락보전의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3]은 조선 전기인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1976년 개금불사에서 나온 복장(腹藏)에서 이 불상이 1596년에 중수되었고 ‘가경 3년 무오 4월 16일 개금(嘉慶三年戊午四月十六日改金)’했다고 쓴 글이 나와서 가경 3년 즉 정조 3년( 1779년)에 개금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방 뒤인 1948년 동짓달에 천은사에 화재가 나서 주요 법당이 소실되고 산신당, 조사전, 화엄암만 남았을 때 이 불상을 삼척 시내에 있는 삼장사(三藏寺)로 옮겼던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2년 뒤에 6.25 전쟁이 터졌다.
6.25 전쟁 때 불탄 뒤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주지 문일봉(文一峰)이 부임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 육화료(六和寮) · 영월루(映月樓) · 삼성각(三聖閣) 등을 신축하고, 요사채를 중수해 다시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천은사 경내에서는 신라 시대에 조성된 금동약사여래입상도 발굴되었는데, 이건 지금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