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01:48:38

찰스 B. 맥베이 3세

찰스 버틀러 맥베이 3세
Charles Butler McVay III
파일:1000130838.jpg
출생 1898년 8월 3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에프레타
사망 1968년 11월 6일 (향년 70세)
미국 코네티컷주 리치필드
복무 미합중국 해군
최종 계급 미국 해군 소장
복무 기간 1920~1949
학력 미국해군사관학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펜실베이니아주 에프레타에서 후일 해군 대장이 된 찰스 B. 맥베이 주니어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 여러 함정에서 복무했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연합참모본부에서 근무하며 공을 세워 은성훈장을 획득했다.

1945년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USS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이 되어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했다. 오키나와에서 카미카제의 역습으로 1대가 갑판에 부딪쳐 8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함포 사격으로 공을 세운 후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했다.

1945년 7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인디애나폴리스는 승조원 1196명을 태우고, 미 육군 항공대의 B-29 폭격기가 출격 대기 중인 티니안 섬으로 향했다. 여기에는 역사를 뒤바꿀 물건인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재료. 고농축 우라늄을 싣고 있었다. 당시 미 해군은 이 임무를 극비임무로 취급하고 일본 해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가 단독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당연히 이러한 항해가 위험한 줄 잘 아는 맥베이는 구축함 등 대잠 호위함을 여러 번 요청했으나 지휘부는 요청을 거절했다.

1945년 7월 28일, 무사히 우라늄을 실어나른 인디애나폴리스는 다음 작전을 위해 필리핀 레이테섬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미 원폭 재료를 하역하여 비밀 준수가 필요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상부에서 호위함을 붙여주지 않아서 단독으로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7월 30일 새벽. 일본군 잠수함 I-58이 이를 발견하고 어뢰 6발을 발사, 2발을 명중시켰다. 이 공격으로 인디애나폴리스호는 치명타를 입었다. 당시 인디애나폴리스는 각종 개장으로 선체 상부 구조물의 무게가 무척이나 무거웠기 때문에, 한 번 무게중심이 깨져 균형을 잃자 불과 12분만에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피격 직후 맥베이은 즉시 구조 신호를 보내고[1], 승조원들에게 퇴함 명령을 내려, 폭발 직후 사망한 300여 명을 제외한 승조원 대부분이 퇴함에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생존자는 900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는 오지 않았다.

결국 5일동안 300명이 넘는 승조원이 지쳐서 혹은 상어떼에 목숨을 잃었고 8월 2일, 정기적으로 정찰을 하는 해군의 PBY 카탈리나 비행정이 처음으로 바다 위에 떠다니는 생존자들을 발견하여 구조하였고, 그 후 약 이틀간 구축함까지 동원되어 생존자를 건져올렸다. 그래서 최종 생존자는 3분의 1 남짓한 316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해군은 책임 떠넘기기로 맥베이를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당시 일본 잠수함 함장이였던 하시모토도 증인으로 참석해 맥베이를 변호했지만 해군측에선 억지로 맥베이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며 보직해임, 불명예 제대했다. 이후 체스터 니미츠에게 사면받았고 1949년 소장으로 퇴역했다. 퇴역 후에도 유족들의 협박 편지, 전화에 시달렸고 결국 1968년 자택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1997년 12세의 헌터 스콧이 미국역사를 기념물을 준비중 영화 죠스의 모티브인 인디애나폴리스 함 침몰사건을 알게되었고 생존자 150명을 인터뷰했고 탄원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인디애나폴리스를 침몰시켰던 하시모토 중좌가 존 워너 상원의원에게 자신이 인디애나폴리스를 침몰했고 맥베이의 혐의는 부당하다는 편지를 보내 널리 알려졌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맥베이를 복권했고 생존자 316명 전원에게 은성훈장을 수여했다.

이 사건 이후로, 해군은 충분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함선이 침몰된 상황에서 함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게 되었다.


[1] 해군 통신 중계소가 감지했지만 누구도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한 수신소는 당직사관이 술에 취해서 자느라, 다른 수신소는 당직사관이 노느라, 또 다른 수신소는 일본 해군의 계략이라고 판단해서 구조 신호를 무시했다. 이외에도 맥베이는 조명탄, 거울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조 신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