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5:37:21

지가 베르토프

<colbgcolor=#ffffff,#1f2023> 지가 베르토프
Дзига Вертов | Dziga Vertov
파일:dzigaVertov.jpg
본명 다비트 아벨레비치 카우프만
Дави́д А́белевич Ка́уфман
국적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제국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공화국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출생 1896년 1월 2일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현 벨로스토크군 벨로스토크
(현 폴란드 포들라스키에주 비아위스토크·Białystok)
사망 1954년 2월 12일 (향년 58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가족 제 미하일 아브라모비치 카우프만
(Михаил Абрамович Кауфман, 1897–1980)
제 보리스 아벨레비치 카우프만
(Борис Абелевич Кауфман, 1903 또는 1906–1980)
배우자 옐리자베타 이그나티예브나 스빌로바
(Елизавета Игнатьевна Свилова, 1900–1975)[1]
1. 개요2. 일생3.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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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가 베르토프는 소련 영화감독이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과 더불어 동시대 소련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며, 대표작으로는 〈키노아이(Кино-глаз)〉(1924), 〈 카메라를 든 사나이(Человек с киноаппаратом)〉(1929)가 있다.

2. 일생

훗날 지가 베르토프라 불리게 될 다비트 아벨레비치 카우프만은 본래 폴란드에서 태어나 20대 초에 미래주의 회화에 매혹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선회하는 팽이’이라는 의미의 ‘지가 베르토프’를 가명으로 사용했다.

이후 1918년부터 모스크바 영화 위원회에서 선전 뉴스 영화의 편집을 담당하며 영화계에 몸을 담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해, 그는 이미 다른 영화에서 사용된 필름들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거기서 베르토프는 굳이 선형적인 서사에 상관없이 서로 아무 관계없는 필름 조각들을 이어 붙여도 완전히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영화이론의 핵심은 ‘포착된 삶’이었다. 그는 선형적인 서사를 가진 영화를 거부했다. 영화는 사실을 담아야하며, 인간의 눈보다 우위에 있는 카메라 렌즈가 이 세상을 총체적이고 과학적으로 파악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신의 원칙에 따라 당 기관지의 이름을 딴 〈키노 프라우다〉라는 선전영화 시리즈를 1922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매달 제작하여 1925년까지 총 23편이 이어졌다. 그의 영화는 단순한 선전영화가 아니었다. 소련 인민들의 생생한 삶을 낱낱이 기록한 그의 영화들은 소련의 현실에 대한 과학적이면서도 감동적인 비전을 강렬하게 제시하였으며, 그의 다수의 논문과 혁신적인 테크닉을 사용한 영화들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대표작인 〈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는 언어가 아닌 순수한 시각 이미지만으로도 자신의 사상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는 패스트 모션, 슬로우 모션, 핸드헬드, 몽타주 등 현대 영화의 대부분의 기법들이 총출동하는 혁신적인 영화였다. 단순히 영화 기법에서만의 혁신이 아니라 그는 이 영화로 영화와 현실, 그리고 영화와 인간 지각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담론에 대중들을 참여시켰다. 허나 이 베르토프 역시도 스탈린의 탄압을 면치 못했다. 카우프만이라는 본명에서 보듯이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여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는 달리 총살이나 노동교화형은 간신히 면했으나, 베르토프는 모든 직위를 박탈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맞선 후방에서의 소련 인민들의 투쟁을 담은 기록영화를 몇 편 제작했지만 그게 전부였고, 이후 그는 관습적인 뉴스영화의 편집일과 같은 소일거리나 하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3. 영향

허나 베르토프의 혁명적인 영화이론은 훗날 많은 영화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장 뤽 고다르다. 그는 베르토프 영화이론의 영향을 받아 스타 배우, 대규모 자본, 매끄러운 서사, 세트 촬영으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영화에 반기를 든, 가히 영화혁명이라 불릴 만한 누벨바그 사조를 이끌었으며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동료 영화인들과 베르토프의 이름을 딴 ‘지가 베르토프 집단(Groupe Dziga Vertov)’을 결성해 정치영화 운동을 벌였다.


[1] 1923년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