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8 09:02:55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



1. 개요2. 배경
2.1. 린뱌오의 불안2.2. 천보다의 사정
3. 전개
3.1. 국가주석직의 폐지3.2. 전원회의 개최3.3. 마오쩌둥의 반격
4. 결과5. 참고문헌

1. 개요

中国共产党第九届中央委员会第二次全体会议

1970년 8월 23일부터 9월 6일까지 진행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간단하게 9기 2중전회라고 부른다. 문혁을 지휘했던 이론가 천보다가 실각하고 린뱌오의 운명에게도 영향을 준 사건이다.

2. 배경

2.1. 린뱌오의 불안

린뱌오는 정강산 시절부터 함께 한 마오쩌둥의 오랜 전우이자 중일전쟁, 국공내전에서 큰 전공을 세운 군인으로, 1949년에 중앙위원회에 진출, 1955년에 정치국 위원, 1958년 5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를 맹렬히 비난한 이후 중군위 부주석, 국방부장에 임명되면서 빠르게 승진하고 있었다. 19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는 린뱌오를 유일한 부주석으로 선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선포하였으며, 1969년 9차 당대회에서 아예 당장에다가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후계자라고 박아넣는 파격적 대우를 받게 되었다. 린뱌오는 1968년 즈음에 완전히 군권을 장악하였으며 그의 아내 예췬도 정치국 위원이 되었고, 그를 추종하는 제4야전군 출신 이작붕, 오법헌, 구회작, 황영승 등이 군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치국에 대거 진출하였다. 문혁으로 당조직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대부분의 성급 기관을 현역 군인들이 지배하는 등 중국은 가히 중국판 선군정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상황에서 린뱌오의 의중이 어땠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반적으로 린뱌오가 정신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잘 알려진대로 린뱌오는 (총상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갖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만성적인 두통, 불면증, 망상증, 공수증세를 보이면서 제대로 물을 섭취하지 못하고 물만두나 찐빵으로 수분을 보충할 정도였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수차례 소련을 다녀왔지만 차도를 보이지 못했다. 나중에는 의사들이 자기를 독살하려 한다는 망상에 휩싸여 제대로 된 진료를 거부하고 부인 예췬이 그를 보살폈다. 차차 그가 업무를 보지 못하는 일도 늘어났으며,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각종 약물을 사용하였다. 전통적인 연구는 이러한 상황에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 장춘차오를 좋은 후계자감으로 거론하며 간을 보았고 야심많은 장칭이 그를 계속 공격하면서 린뱌오가 기존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으로 미쳐 날뛰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린뱌오의 측근인 구회작 장군의 딸 추진 교수와 천안문 사태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가오원첸 등은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린뱌오의 극도의 히키코모리 성향은 마오의 후계자 자리조차도 부담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에게 자신을 후계자로 삼지 말아달라고 거듭 요청했고, 오히려 린뱌오의 후계자 추대를 지지한 것은 장칭이었다는 것이다.

2.2. 천보다의 사정

한편 당내 좌파 이론가는 뜻밖에도 린뱌오를 지지하고 나섰다. 1966년 중앙문혁소조가 구성되었을 때 소조장으로 활약했고 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이른 천보다의 지위 역시 나름 굳건해보였으나, 1968년 이후 그는 캉성과 장춘차오에게 밀려서 차차 영향력을 잃었다.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 이후 왕리, 관펑, 치번위 등 조반파 과격파들은 대거 실각해버렸고, 천보다의 기반인 베이징의 대중운동은 종식되었다. 반면 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의 상하이는 상대적으로 건재했다. 여기에 천보다는 개인적으로 장칭이 신경질적이고 권력에 굶주렸다고 매우 혐오했다.

1969년 중앙문혁소조는 해체되었고,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이 부상하여 강청과 결탁, 마오쩌둥의 총애를 받으면서 천보다는 상당한 불안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9차 당대회 때 린뱌오의 정치보고를 작성하기로 한 것은 천보다였으나 천보다가 만족스러운 초안을 작성하는데 실패하면서 그는 강판되고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이 캉성의 감독 아래에 보고서를 집필했다.

더군다나 장칭과 린뱌오의 싸움에 있어서 장기적으로 군을 장악하고 후계자로 선포된 린뱌오의 우세는 확고해보였다. 따라서 천보다는 장칭보다는 린뱌오를 지지하는 것이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그와의 연합을 결정한다.

3. 전개

3.1. 국가주석직의 폐지

1970년 3월 8일, 제4차 전국인민대표대회 개최에 앞서 마오쩌둥은 헌법을 수정하고 국가주석직 폐지를 시사하였다. 3월 9일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제의가 승인되었고, 3월 16일에 관련한 내용들이 확정되어 마오쩌둥의 비준을 받았다. 3월 17일부터 3월 20일 관련한 공작회의가 소집되어 헌법공작소조가 구성되고 캉성, 장춘차오, 오법헌, 이작붕, 지덩쿠이가 소조원으로 위촉되었다.

하지만 린뱌오는 국가주석직이 존속되기를 희망하였다. 린뱌오는 과거 마오쩌둥이 류사오치를 후계자로 세웠을 때 그를 주석으로 삼고 자신은 2선으로 물러난 것을 두고 만약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이 되고 싶었으면 진작 되었을 것이니 만약 국가주석직이 존속된다면 자연스레 자신이 주석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설명이다. 실제로 오법헌의 증언에 따르면, 마오쩌둥도 만약 국가주석직이 존속된다면 린뱌오가 주석이 될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그의 아내 예췬도 국가주석이 없으면 린뱌오가 대체 어디에 취임해야 하냐면서 국가주석직을 탐내었다. 일단 탐욕스러운 예췬이 남편이 국가주석이 되길 원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히키코모리 성향이 폭발하고 있던 린뱌오는 자신이 국가주석이 되어 외국 손님들을 맞이하고 해외 순방도 가야 한다는 사실에 경기를 하면서 싫어했다는 자료들이 있다. 따라서 린뱌오는 정말로 자신이 아니라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분석 역시 있다.

어쨌거나 강소성 소주에서 요양하고 있던 린뱌오는 비서를 시켜서 4월 11일, 국가주석직의 폐지는 인민의 심리상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국가주석직 존속을 제안했으나, 4월 12일 마오쩌둥은 자신은 주석직을 수행할 수 없으며 적절하지 않은 제안이라고 반대했다. 린뱌오가 무려 6차례나 마오쩌둥이 주석이 되어야 한다고 떡밥을 뿌려대자, 4월 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 폐지를 다시 언급하면서 자신이 국가주석직이 되는 것은 손권이 조조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한 것과 다름없다면서, 자신을 조조로 만들지 말 것이며 당간부들도 손권이 되지 말라고 교시하였다.

하지만 공군사령원 오법헌, 해군 정치위원 이작붕 등 헌법 작성에 참여하게 된 린뱌오의 추종자들은 국가주석직 존속을 시끄럽게 주장해댔다. 마오쩌둥이 7월에 또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린뱌오는 끈질겼다. 린뱌오는 자신이 주석이 되고 싶지 않다고 강조하면서 중국처럼 거대한 국가에는 반드시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적 수반이 없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 국가주석직이 없는 체제에서 린뱌오에게 약속된 것은 기껏해야 저우언라이와의 공동 체제 정도로 보였기 때문에 린뱌오가 불안하게 여겼다는 분석이 있다. 그리고 국가주석이 되면 과거 류사오치가 그랬던 것처럼 국제외교를 수행하면서 국제적 명망을 높일 수 있다는 노림수도 있었다고 하는데, 위에서 지적했듯이 린뱌오의 성격상 의문이 들고 만약 사실이라면 차라리 예췬의 생각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마오쩌둥은 린뱌오에게 국가주석직이 남더라도 자신도 린뱌오도 맡아선 안되며 차라리 둥비우를 주석으로 삼고 젊은 간부들을 부주석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선을 그었다.

1970년 8월 13일의 헌법개정공작소조회의와 8월 14일 정치국 회의에서 린뱌오 그룹이 사실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을 원한다면서 국가주석직 존치를 주장하고 나서자 장칭을 지지하는 캉성과 장춘차오는 마오쩌둥은 주석직을 원하지 않는다면서 맹렬히 반대했다. 린뱌오 그룹은 또한 '마오쩌둥 사상은 전국의 사업을 지도하는 방침이다'라는 대목과 마오쩌둥을 천재로 표현하는 헌법조문을 넣자는 <천재론>을 들고 나왔지만, 캉성과 장춘차오는 이미 있는 구절을 왜 또 넣냐고 반대했다. 린뱌오가 마오쩌둥에게 퍼붓는 지나친 찬양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장춘차오는 뼈가 있는 비판을 하였다.
끊임없이 마르크스주의나 마오쩌둥 사상을 떠들어대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이 논쟁에서 천보다는 린뱌오 그룹을 지지했고 회의는 소강 상태에 빠졌다. 8월 22일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천보다, 캉성이 회의 의제에 합의하였다. 마오쩌둥은 분파주의의 극복과 통합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린뱌오와 천보다가 근성있게도 국가주석직을 보존하자면서 마오쩌둥을 또 주석으로 추대했고, 마오쩌둥은 분명하게 거절하면서 그 직위를 맡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이러한 와중에 8월 23일에 9기 2중전회가 소집되었다.

3.2. 전원회의 개최

8월 23일, 저우언라이의 주재로 전원회의가 개막되었다. 회의 진행 중 린뱌오가 갑자기 발언권을 요구했다.
'마오쩌둥 주석은 천재다'라고 우리는 말했는데, 나는 지금도 이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마오 주석의 학설은 과학입니다. 인류를 해방시키는 과학입니다.

린뱌오는 무려 90분이나 마오쩌둥을 찬양하면서 마오쩌둥 사상의 지도적 역할,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 국가원수, 최고 지휘관으로 마오쩌둥의 역할을 새 헌법에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국가주석직 보존에 반대하는 자가 바로 반마오주의자라고 위협했다. 기존 연구들은 린뱌오가 마오쩌둥가 상의하지도 않고 멋대로 행동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판초프는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허락을 받고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마오쩌둥이 장칭을 직접 호명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실제로 린뱌오는 마오쩌둥이 시킨대로 했고, 참가자들은 당연히 이 천재론에 대해서 열렬히 찬성을 표했는데, 대장정에 참여했던 원수들조차도 찬성을 표했다. 감히 마오쩌둥 찬양에 태클을 걸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장칭은 모두의 미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월 23일 저녁, 경제계획을 논하는 정치국 회의에서 오법헌은 다음날 회의 일정을 조정해 린뱌오의 연설 테이프를 청취하고 이를 논의하자고 주장했고, 이는 승인되었다. 다음날인 8월 24일 아침, 예췬은 심복들에게 4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 1. 린뱌오의 연설을 옹호하고, 천재론을 견지할 것.
  • 2. 국가주석의 설치 주장을 견지할 것.
  • 3. 장춘차오를 집중공격할 것. 다만 이름을 거론하지는 말 것.
  • 4. 발언할 때에는 눈물을 흘려 감정을 표현할 것.

그날 오후, 화북, 중남, 서남, 서북 소조회의에서 천보다, 예췬, 오법헌, 이작붕, 구회작 등이 모두 린뱌오의 주장을 지지하고 나섰고 천재론에 관한 마오쩌둥의 어록을 배포했다. 화북소조 회의에 출석한 천보다는 마오쩌둥의 국가주석 추대를 반대하는 자는 모두 마오쩌둥이 천재임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우물에 독을 푸는 전술로 나가면서 장춘차오를 공격했고, "레닌에 의하면 천재를 부정하는 것은 지도자를 부정하는 일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마오 주석이 당대의 가장 위대한 천재라고 인정하지 않는 자를 끌어내어 본때를 보이기 위해 당에서 제명하여 철저히 비판하고, 토막내 버려야 합니다."라고 속사포처럼 공격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천재를 발견한 자도 천재이고, 천재의 참모도 천재라고 덩달아 린뱌오를 칭송했고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를 두고 전재, 수재, 발군지재 운운하며 3대 계승론을 들고 나왔다.

린뱌오의 전략은 주효했는데, 4인방의 일원인 왕훙원까지도 린뱌오 연설을 찬양하였고, 마오쩌둥의 충실한 부관인 왕둥싱도 화북소조 회의에서 천보다의 연설에 동조하였다. 8월 25일 오전, 천보다의 과격한 선동이 담긴 간보(전원회의 제6호 속기록, 소위 화북조 제2호 속보)가 배포되자 장칭 그룹은 대단히 동요했다.

3.3. 마오쩌둥의 반격

당황한 장칭, 장춘차오 등은 그길로 마오쩌둥에게 달려가서 도움을 청하면서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속이고 비열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하는 짓의 의미를 대략 파악하였고, 8월 25일 오후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하여 앞으로의 소조회의에서 린뱌오의 연설에 대한 논의를 중지하고 천보다의 발언이 담긴 회보를 회수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천보다에게 두번다시 국가주석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면서 자신을 빨리 죽게 만들고 싶냐고 힐난했다. 그리고 린뱌오에게도 국가주석이 될 생각을 하지 말라면서 천보다에게 자아비판을 하게 했다.

8월 31일, 마오쩌둥은 <나의 몇가지 의견>이라는 글을 회람시켜 천보다가 자산계급 이상주의자라고 맹공격하며 그가 많은 동지들을 기만했다고 하였다. 마오쩌둥은 천보다가 돌연적인 습격을 들이대고 악을 선동하며 천하가 동란에 빠지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며 루산을 폭파하여 평지로 만들고 지구를 돌지 못하게 하려는 기세를 보인다고 엄청난 비판을 쏟아냈다. 하지만 천보다만 숙청되고 일단 린뱌오는 공격당하지 않았다. 군권을 장악한 그를 갑자기 비판하고 격하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왕훙원은 서둘러 천보다 비판을 시작했고,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반격에 크게 당황하면서 동시에 실망했다. 전원회의 마지막 날인 9월 6일에 마오쩌둥은 다시 못박았다.
인민을 대표하는 표지가 국가주석이 되는 일이라면, 십여년 전에 국가주석을 그만둔 나는 무려 십여년 동안 인민을 대표하고 있지 않은 셈이 되지 않습니까? 인민의 대표가 되고 싶은 자가 있다면 그가 인민의 대표가 되면 될 것이 아니겠소. 나는 안한다고 말해 두겠소.

회의는 종래 의정대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개정초안을 채택하고 적당한 시기에 제4차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할 것을 전인대 상무위원회에 제안하기로 결정하고 오후에 폐막했다. 당황한 예췬이 린뱌오의 측근들을 거느리고 그날 밤 마오쩌둥을 찾아가서 천보다에게 속았다고 잘못을 빌었다. 린뱌오는 방에 틀어박혀서 침묵했고, 루산을 떠나면서 "우리는 장군이라 전투하는 방법밖에 몰라!"라고 한탄하면서 덧붙였다.
"비군사적 방식으로 처리해서는 안되며 군대를 이용해아만 가능하다."

그리고 린뱌오는 휘하 장군들에게 자아비판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오법헌, 예췬 등은 합의한대로 거짓 자아비판서를 마오쩌둥에게 제출했지만 마오쩌둥은 천보다만 탓하고 있으니 공산당원으로의 기개가 없다고 조소했다.

4. 결과

마오쩌둥은 1970년 말부터 천보다 숙청을 구실로 린뱌오의 권력기반 약화에 들어갔다. 린뱌오는 대미 외교에서 대국주의 쇼비니스트로 비판을 받고 밀려났으며, 중앙군사위원회에 예젠잉이 추가되면서 린뱌오를 견제했다.

1970년 12월 22일부터 1971년 1월 24일 사이에 개최된 베이징군구 당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 린뱌오에게 충성하는 38사단을 밀어내고 베이징군구를 재편하는 한편, 정치국 후보위원이며 베이징군구 정치위원 이설봉과 베이징군구 사령원 정유산을 천보다의 끄나풀로 지목해 숙청했다. 후임으로 리더성이 군구 사령원, 셰푸즈가 제1정치위원, 지덩쿠이가 제2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1971년 4월 7일, 정치국 후보위원 겸 베이징군구 제2정치위원 지덩쿠이와 부총참모장 장재천이 중군위 판사소조에 포함되어 린뱌오를 견제했다. 이후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천보다는 1971년 1월 26일, '반당분자 천보다의 죄증 자료'가 배포되면서 비진정풍이 시작, 1971년 3월, 선동적 정치사기꾼으로 몰려 비판을 받았다.

한편 린리궈는 571 공정이라 불리는 쿠데타 획책에 들어갔으며, 이는 1971년 9.13 사건으로 이어져 린뱌오 일가의 몰살이라는 비참한 결말로 이어진다. 이후 비림비공운동이 전개되었고, 마오쩌둥 사후 천보다와 린뱌오 그룹의 장군들은 4인방과 함께 1980년 11월 20일에 재판에 회부되어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다.

5. 참고문헌

  • 김정계, 중국의 권력투쟁사 1949~ 1978(서울: 평민사, 2002).
  • 로드릭 맥파커 엮음, 중국현대정치사(서울: 푸른길, 2012).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서울: 민음사, 2017).
  • 산케이신문 특별취재반, 모택동 비록 하권(서울: 문학사상사, 2001).
  • 백승욱(2010), 천보다(陳伯達)를 통해 본 중앙문혁소조의 문화대혁명. 현대중국연구 12(1).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2권 하(서울: 서교출판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