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5:12:53

주녕하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朱寧河

한국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일에 대해서는 1908년생, 1915년생 등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CIA 문서에 따르면 1911년 출생으로 추정된다.

경성제국대학 졸업 이후 1925년 조선공산당에 입당,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여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지도하였고, 제1차 태평양노동조합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후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 직원으로 취직, 노동자들을 상대로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30년 12월, 연구회를 연구회뷰로로 개편, 총무가 되었다. 1931년 1월, 연구회 뷰로를 좌익노동조합결성준비회로 개편하여 조사부 책임자가 되었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1931년 4월, 검거를 피해 소련으로 도주하였으며 그곳에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1935년 3월 25일, 함경북도 경원을 거쳐, 다른 공산대학 졸업자들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도모하다가 평양적색노조 사건으로 체포되어 1936년 5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후 박정애, 김용범과 함께 평양의 무기공장 노동자들을 적노회로 조직하였다. 조선공산당 홍원군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1945년 9월 원산시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급당열성자대회에 참석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립에 참여하여 조직부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2월, 강량욱과 함께 각정당사회단체발기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출범한 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정치위원회 위원,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으로 선출되었다. 국내파 오기섭 등이 박헌영의 영도권을 지지한 것과 달리 김일성의 영도권을 계속 지지하였다. 1946년 9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2차 확대회의에서 면·군·시·도 인민위원 선거 중앙선거지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11월, 북로당 중앙위원회 4차 확대회의에서 주녕하는 <오기섭 동지의 좌우경적 오류에 대하여>라는 의제를 상정하여 주녕하가 자본주의 노동조합 이론으로 노동자들을 선동하려 했다고 맹비난하였다. 오기섭은 레닌 선집을 가져와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대목을 읽으며 저항했으나 결국 2차 당대회에서 조소해운공사 부사장으로 좌천된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상무위원회 위원, 정치위원회 위원,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남북연석회의 준비위원장을 지냈으며,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초대 내각에서 교통상에 임명되었다. 원래는 내무상이나 외무상 등 주요 직책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연안계의 반발 때문에 내무상은 박일우에게 빼앗겼으며, 외무상은 박헌영이 차지하였다. 1949년 6월, 남북로당이 합당되어 중앙위원회가 다시 선거되면서 중앙위원회 위원에는 재선되었으나 박헌영 등 남로당 거물들이 월북하면서 국내계 대표 자리를 잃게 되어 정치위원, 당 부위원장에는 탈락했다. 이후 2차 전원회의에서 부위원장에 보선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1949년 10월, 초대 소련 대사로 부임하면서 박의완에게 교통상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1951년에 소환되어 림해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 외무성 부상에 임명되었으며 정전회담에도 참석하였다.

하지만 휴전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1953년 2월 15일자 로동신문은 박헌영, 주녕하, 임화, 김남천, 조일명 등이 당을 불신하고 당의 정책과 지도노선을 비방했으며, 높은 지위를 탐낸 지방주의자, 종파주의자라고 맹비난하였다. 1953년 8월, 6차 전원회의에서 주녕하는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제명, 출당조치되었다. 1953년 재판에서 신정부 부수상으로 계획되어 있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나마 김일성을 도운 공을 인정받아서인지 1956년 교육성 부상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8월 종파사건 이후 다시 숙청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1959년 4월, 함경남도 당위원장 현무광은 오기섭과 주녕하를 지방할거주의적 반당종파분자로 지목하고 부관참시하였다. 현재 북한에선 그가 김일성을 초기에 지지한 것은 싹 무시하고 박헌영을 추종한 떨거지라고 까고 있다.

하지만 발라즈 샬론타이 교수가 그의 최후에 대한 헝가리 외교문서를 발굴하였는데, 그의 저서에 따르면 주녕하는 처음에는 작은 가금류 목장 지배인으로 하방되었으나 김일성이 그래도 과거에 자신을 공로한 공을 이쁘게 여겼는지 1954년에 교육대학의 교수로 다시 승진시켜주었다고 한다.

3. 참고문헌

  • 강만길, 성대경,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서울: 창작과비평사, 1996).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이정식, 로버트 스칼라피노,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파주: 돌베개, 2015).
  • Balazs Szalontai,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1] 위원장은 김책, 위원으로 김용범, 최경덕, 김달현, 리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