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2:21:49

존 빙



파일:John_Byng.jpg

1. 개요2. 일생
2.1. 해군 경력2.2. 메노르카 해전과 최후

1. 개요

영국의 해군 제독. 7년 전쟁의 첫번째 전투인 메노르카 해전에서 패한 뒤 총살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2. 일생

2.1. 해군 경력

존 빙은 1704년 10월 29일 잉글랜드 베드포드셔주 사우스힐에서 트린톤 자작 조지 빙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18년 3월 13세의 나이로 영국 해군에 입대했고 같은 해 8월 11일 콰드러플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시칠리아에서 복무하며 파사로 곶 해전에 참가했다. 1723년, 존 빙은 중위로 승진했고 1727년에는 HMS 지브롤터 호의 대위로 승진했다. 1742년, 존 빙은 뉴펀들랜드 식민지 해군 준장이 되었고 1745년에는 소장이 되었으며, 1745년과 1746년에는 리스에서 해군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747년, 존 빙은 지중해 함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751년 로체스터 자치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는 이 의원직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1754년, 존 빙은 허트포드셔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에 위치한 브로담 공험 저택의 건축을 위탁했다. 이렇듯 그는 순조로운 경력을 이어갔으나 1756년 그의 운명을 결정지을 사건이 벌어진다.

2.2. 메노르카 해전과 최후

1756년, 영국 해군부는 프랑스 해군이 메노르카 섬을 공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영국 해군부는 3월 8일 지브롤터 해협에 있던 존 빙을 제독으로 승진시키고 3월 11일까지 함대를 준비하여 메노르카 섬으로 출격하는 프랑스 해군을 제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전열함 10척은 상태가 엉망이어서 당장에 수리가 필요했다. 이에 존 빙은 비스케 해협과 만에 있는 27척의 배 중 일부라도 동원하는 걸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영국 해군성은 존 빙이 이 선박을 이용하는 건 물론이고 이 선박들에서 일하는 선원들을 데려가는 것도 거부하고 주어진 전열함 10척의 수리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상태가 안 좋은 10척의 전열함을 이끌고 적을 막으러 출항해야 했다.

이후 1756년 5월 20일에 벌어진 메노르카 해전에서, 존 빙은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직 배 한 척도 가라앉지 않긴 했지만 더 싸워봐야 전세를 뒤집을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전쟁 협의회를 소집해 지브롤터로 철수하자고 제안했고 함장 전원이 동의를 표했다. 결국 존 빙의 함대는 지브롤터로 철수했고 메노르카 섬 요새 수비대는 6월 28일에 항복했다. 이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분노했고 영국 해군부는 그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죄목을 들어 그를 체포하게 했다. 결국 존 빙은 7월 26일에 전격 체포되어 8월 19일 그리니치로 보내졌고 12월 23일 포츠머스로 옮겨졌다.

12월 27일, 존 빙의 재판은 포츠머스 항구에 있는 성 조지 호에서 개최되었다. 당초 존 빙의 무능과 무책임을 성토하던 국민들은 점차 존 빙이 처했던 진짜 상황을 알게 되자 해군부가 모든 책임을 존 빙에게 떠넘겼다고 비난하며 존 빙을 동정했고, 심지어는 당시 메노르카 해전의 프랑스 함대 제독도 존 빙 제독은 패전의 책임이 없다고 변호하는 편지를 보내왔고 많은 해군 인사들은 국왕의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조지 2세는 무슨 생각인지 확실한 증인과 증거가 있는대도 무시하고 국법대로 집행할 것을 지시했고, 결국 존 빙은 1757년 1월 27일 총살형 판결을 받은 뒤 5월 14일 전열함 모나크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향년 53세. 그의 시신은 사우스힐에 매장되었다. 사실상 해군성에게 희생양으로 취급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