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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규(1902)

파일:조경규.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902년 11월 26일
경상북도 경주부 노동동
사망 1988년 12월 26일
경상북도 경주시
이명 조인좌(趙仁佐)
법명 일성(一城)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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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조경규는 1902년 11월 26일, 경상북도 경주부 노동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를 따라 사찰에 자주 들렀고, 일찍부터 불교에 흥미를 느꼈다. 21세 때 집을 떠나 속리산 법주사 강원에 입학하여 불교를 공부했는데, 원효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한편 불가에서 전해오는 한방치료법을 익혔다.

법주사 강원에서 3년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26년 2월 마산 광산사 법흥스님으로부터 광복단에서 활동중이던 김세균(金世均)을 소개받았다. 그는 김세균의 설득을 받아들여 광복단에 입단한 뒤 신분을 숨기기 위해 조인좌(趙仁佐)라는 가명을 쓰고 집을 나섰다. 그가 맡은 일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단체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거창군에 있는 고견사(古見寺)를 찾아가 주지스님으로부터 600원을 받아낸 뒤 허정에게 전달했다. 이후 덕유산 용차사와 장수사 등지에서 은신하다가 경남 함안군으로 내려왔고, 그곳에서 자금을 모금하여 윤겸석(尹兼石), 송병준(宋秉晙), 홍원표(洪元杓) 등에 제공하고 태극기를 제작해 배포했다.

그러나 이웃의 밀고로 체포된 그는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동지들의 연계관계를 끝까지 발설하지 않았다. 그후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거창형무소에 수감된 뒤 수감자들에게 한문과 불교를 가르쳤다. 1년 6개월 만에 모범수로 출감된 뒤 쌍계사, 법주사, 직지사, 화엄사 등지를 찾아가 독립운동자금을 모았다. 속리산 복천암의 용화스님으로부터 한방의학을 전수받았으며, 김해시 해온사 주지 천일스님으로부터 보금자리를 제공받고 그곳에서 수행하며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조경규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사찰과 암자를 전전하며 배운 한방의술로 사람들을 치료했다. 평생 약 한 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앓던 사람들을 정성껏 보살피며 처방도 해줬다. 경주 분황사에 머무를 때는 “명의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나서 환자들이 몰려왔다.이때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는 경주에 대덕방 한약방(후에 부용당 한약방)을 개설했다.

조경규는 대부분의 질병을 침으로 치료했는데 ‘침 값’은 받지 않았다. 약을 처방할 때는 적정수준의 약값만 받았고 사정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그마저도 받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이 앞다퉈 몰려들었고, 한약방은 문정성시를 이뤘다. 그는 이런 와중에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다시 체포되어 며칠간 고문을 받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도 한약방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던 그는 6.25 전쟁 발발 후 가족을 잃고 도둑질로 연명하는 아이 8명을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그러던 1953년 5월 경주에서 전쟁고아들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군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조경규는 경주 일대의 아이들을 보육하는 보육시설의 책임자로 선덩되었다.

이후 사재를 털어 10칸 짜리 기와집을 한 채 구입한 뒤 대자원(大慈園)이라고 이름지었다. 호적이 없는 아이들을 자신의 자녀로 입양하였다. 처음엔 20~30 명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했지만, 점점 늘면서 한때 그의 호적에 등록된 아이들의 수는 100여 명에 달했다. 아이들은 대자원에서 미용과 양재 등의 기술을 익혀 사회로 나갔다. 또한 조경규는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위해 경주기술고등학교를 세웠다.

법주사 강원 시절부터 이차돈 원효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조경규는 ‘이차돈.원효 양성사(兩聖師) 봉찬회’를 결성했다. 이차돈 영정을 흥륜사에, 원효의 영정을 분황사에 각각 봉안했으며, 매년 음력 3월 29일마다 원효대재를, 음력 8월 5일에 이차돈대재를 지냈다. 성사 추모재는 차츰 전국적인 불교행사로 발전했다. 또한 그는 경주남산 기슭에 통일암을 짓고 이차돈과 원효스님을 기렸으며, 이차돈 순교탑 건립을 추진했고, 1999년에 흥륜사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1988년 12월 26일, 조경규는 고향인 경주에서 입적했다. 당시 그의 통장 장고는 25만원이었고, 나머지 재산은 모두 대자원과 봉찬회 등 사회단체에 기증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조경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