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2-03 13:23:55

제주의포구-수전포구



1. 설촌유래2. 지명유래
2.1. 서귀진
3. 해안지명
3.1. 자구리3.2. 소남머리3.3. 앞 개3.4. 먼 여3.5. 네성제돌3.6. 망여3.7. 너분여 너릿여 팡달믄여3.8. 섯모3.9. 문섬새끼섬/의탈섬3.10. 모도리코지3.11. 새섬목3.12. 담머리코지
4. 인터넷 속 이야기5. 사람들 속 이야기 6. 기사 속 이야기


송산포구 (수전포)
파일:송산스케치ok.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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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송산포구, 수전포
위치 서귀포시 송산동
근처랜드마크 새섬
새연교
서귀포층패류화석
서귀포항
서귀진성(서귀동 713~717번지 주변)
문섬
이중섭미술관, 이중섭거리(정방동)
칠십리음식특화거리
연외천
천지연폭포
제주올레길6코스

올레길 6코스 / 새섬-새연교-서귀진성-문섬-천지연폭포

파일:수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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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촌유래

출처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서귀포시 동(洞)지역』▼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2014. p.27~
‘서귓개/서귀포(西歸浦)’〉‘서귀ᄆᆞ을/서귀리(西歸里)’>‘풍덕리(豊德里)>서귀리(西歸里)’>‘송산동(松山洞), 정방동(正房洞), 중앙동(中央洞), 천지동(天地洞)’
서귀포는 일찍부터 서귀(西歸) 또는 서귀포(西歸浦)로 표기하였다. 서귀의 어원은 미상이다. …
『세종실록』(21년 2월 임오)과 『신증동국여지승람』(권38, 정의현), 『탐라지』(정의현, 산천) 등에 ‘서귀포/서귓개’,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에 ‘서귀포’, 서귀〔진(鎭)〕, 구서(旧西)〔구서귀(旧西歸)〕’, 「탐라지도」와 「제주삼읍도총지도」 등에 ‘서귀진(西歸鎭), 구서귀(旧西歸)/옛서귀, 수전포(守全浦)/수전개’, 『호구총수』(전라도, 정의, 서홍로면)와 「제주삼읍전도」, 「정의군지도」 등에 ‘서귀리(西歸里)/서귀ᄆᆞ을’, 『정읍읍지』, 「정의지도」에 ‘서귀진(西歸鎭), 풍덕리(豊德里)/풍덕ᄆᆞ을(?), 수전포(水戰浦)/수전개’ 등으로 표기하였다.
서귀포(西歸浦)는 ‘서귓개·서귀개’의 한자 차용 표기이다. ‘서귀’의 뜻에 대해서는 한자 표기 그대로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뜻인지, 아니면 단순히 ‘서귀’의 음가자 결합 표기인지 좀 더 연구해야 한다. 서귀포는 일찍부터 방어소(防禦所) 또는 수전소(水戰所)로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수전포(水戰浦)/수전개’는 서귀포수전소(西歸浦水戰所)가 있었던 개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혹 ‘수전(守全)’이라는 표기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수전(水戰)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 [네이버블로그]] 서귀조점]]
  • [[네이버블로그] '사진으로 보는 제주 옛모습' 발간]]

2. 지명유래

출처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서귀포시 Ⅱ 동(洞)지역』,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2014. p.29~

2.1. 서귀진

현재 서귀진성의 위치는 ‘솔동산’이라 불리는 곳 동쪽 지역인 서귀동 713~717번지 주변이다.
서귀포의 경우, 산남 그것도 정의·대정현의 경계점에 위치해 있었기에 방어에 어려움이 따랐고 상대적으로 외침의 수난은 더 가중되었다.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세워진 것이 ‘서귀진성’이다.
서귀진(西歸鎭)의 모습은 『탐라순력도』 수록 화폭의 ‘서귀조점(西歸操點)’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이 그림은 1702년(조선 숙종 28)에 만들어졌다. 그림을 살펴보면 서귀진을 중심으로 동서 타원형으로 축성이 되어 있고 동·서쪽에 성문이 있으며, 성내에는 병기고, 객사, 창고 등 여덟 채의 건물이 있으나, 병기고만 지붕이 기와로 덮여 있을 뿐 나머지 일곱 채는 모두 새로 덮여 있다.
성문 밖 서북쪽에는 활 쏘는 연습장인 사장(射場)이 보인다. 서귀성이 당시에는 새로운 지역이었던 듯 성 북쪽 구서귀(舊西歸) 지역에는 잣성이 들러져 있어 말들을 사육하고 있다. 또한 서귀포에는 ‘수전(水戰)’이라 하고 있기도 하다.
『탐라지』(1653년) 정의 성곽·방호소에는 ‘서귀성은 돌로 쌓아 있으며 주위가 825척 5촌, 높이 12척, 성장(城將) 1명 있다. 서귀방호소는 서귀포에 있으며 동성(東城)에는 객사, 병창, 군기고, 사정이 있다. 정방연의 물을 이끌어다가 동성안에 작은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가두고 남은 물은 서성(西城)밖으로 흘려보냈는데, 영차(榮差)와 여사(旅師) 각 1인씩 근무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제주목사 이원조(1841~43)의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에는 ‘서귀성은 본래 홍로천 위에 있었으나, 1590년(조선 선조 23) 목사 이 옥(李 沃)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성은 정의현 서쪽 70리에 있고, 성 둘레는 825척, 높이 12척이며, 서쪽과 남쪽에 성문이 있고 성안에는 객사, 별창, 군기고, 사장이 있다. 조방장(助防將) 1명, 지총 1명, 방군(防軍) 70명과 사후선(伺候船) 1척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귀진 아래에 있는 포구를 수전포(水戰浦)라 부르며, 항구가 매우 넓어 절벽을 의지하면 수백 척의 선박을 감춰 둘 수가 있는 곳이다. 서귀진 주면에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다만 어려운 몇 가구만 살고 있다. 때문에 서귀진 주변에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진(鎭) 아래 사용하지 않는 목장을 이곳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조 8섬지기 분량에 한하여서는 영구히 세금을 감면하여 떠나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성 밖에는 다분히 논이 있었다. 성의 동쪽에서부터 정방연의 상류까지 수로를 파서 물을 이끌어와 논을 만들고, 식수로 사용하다 남는 물은 성 남쪽 밭으로 보내어 모두 옥토로 바꾸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정의군고지(旌義郡古誌1)』(1899년, 조선 광무 3)에는 ‘서귀성을 서귀보(西歸堡)라 하며, 석성(石城)으로서 주위가 825척, 높이 12척, 동쪽과 서쪽에 각각 성문이 있고, 성안에는 우물이 있으며’, 당시의 「정의지도」에는 서귀진 위쪽을 ‘풍덕리(豊德里)’, 서귀포를 ‘수전포’, 서귀진에는 ‘동문’과 ‘서문’이 표기되어 있다.
현재의 서귀진성 위치는 ‘솔동산’이라 불리는 곳 동쪽 지역인 서귀동 717번지이다.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지방행정이 이루어졌으며, 환상(환곡)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커다란 기와집 3채가 있었고, 죄인을 가둬두는 곳도 별도로 두었다. 건물 입구에는 문이 있었으며, 이 문이 있었던 곳을 ‘성문거리’라고 했다. 1906년(광무 10) 서귀진이 일본에 의해 폐지가 되면서 서귀순사분파소(파출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파일:수전포03.jpg

3. 해안지명

출처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서귀포시 Ⅱ 동(洞)지역』,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2014. p.32~

3.1. 자구리

서귀포항의 서쪽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다.
옛날에는 소와 돼지 등 가축을 잡는 도축장으로 사용하였다. 소를 잡는 곳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하므로 소를 잡는 데는 알맞은 곳이었던 것이다. ‘소를 잡는 곳’이라는 뜻으로 ‘자구리’로 불려지고 있다. 현재 물이 솟아나고 있어 빨래터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3.2. 소남머리

자구리와 이어져 있는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소남머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옛날 일본인 큰 부자가 냉동공장을 만들기 위해 파 놓았다는 곳이다. 그런데 땅의 형상이 ‘소머리’모양 같이 생겼다는데서 ‘소남머리’라 일컬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설은 주변에 소나무가 많았고, ‘머리’는 동산이라는 뜻임으로 소나무가 많은 동산이 라는 데서 ‘소남머리’라 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물 나는 곳을 목욕하는 장소로 쓰고 있다.

3.3. 앞 개

‘자구리’에서 서귀항 방파제까지 일대를 일컫는다. 앞쪽에 있다해 ‘앞개’라 부른다. ‘개’는 해변을, ‘갯창’은 포구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서귀동지역 바다 가운데 가장 풍부한 자원의 보고였다. 소라, 독고달, 미역, 성게, 전복 등이 많이 생산되었다. 지금은 매립되었다. 매립 전에는 모든 좀녀가 물질할 수가 없었으며, 좀녀 중 중군 이상되어야 ‘물질’할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깊었었다. 바로 남쪽에 ‘도수장여’가 있다.

3.4. 먼 여

‘소남머리’남쪽 해상에 위치한다. ‘소남머리’에서 떨어진 ‘여’라고 하여 ‘먼여’라고 부른다. ‘여’는 썰물 때 보이거나 또는 밀물 때 바다 속에 잠기는 바위를 말하는 제주어이다. 소라, 톳, 미역 등이 많이 생산됐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3.5. 네성제돌

‘자구리’ 남서쪽에 있다. 큰 바위 네 개가 마치 형제처럼 서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미역, 천초 등이 많이 생산되었었다. 서귀항 개발로 일부 매립되었다.

3.6. 망여

‘새섬’ 남동쪽 방파제 끝 지점이며, ‘도수장여’ 남서쪽에 위치한다. ‘망’처럼 ‘여’가 형성되어 있어 불려진 이름이다.

3.7. 너분여 너릿여 팡달믄여

‘앞개’ 지나 문섬 가기 전에 있다. ‘너븐’은 넓다의 제주어이다. ‘여’가 넓게 형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깊어 능력이 뛰어난 해녀, 곧 상군들이 들어가 ‘물질’하는 작업장이었다. 수확량이 매우 많았으나 물살이 거칠다.

3.8. 섯모

문섬 서쪽의 가장 완만하게 형성된 암반 능선이다. 문섬의 서쪽에 ‘모’가 진 곳이라 하여 ‘섯모’라 부른다. 문섬으로 상륙할 때 이용한다. 북서풍 때문에 이곳은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한다. 주변은 경사가 매우 완만하여 섬으로 오르기에 알맞다.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라 낚시를 제외한 섬 상륙은 금지되어 있으며, 섬 정상에는 1920년대에 세워진 무인등대가 있다.

3.9. 문섬새끼섬/의탈섬

서귀동 산 5번지에 위치한다. 섬 높이 28.5m이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1702년 제작 『탐라순력도』, 1861년 작성 『대동여지도』 등에 ‘의탈도(衣脫島)’라 표기되어 있다. 문섬의 ‘민둥섬’과 같은 뜻을 담고 있는 듯 하다. 의역을 하면 ‘옷 벗은 섬’이 된다. 어민들은 ‘새끼섬’으로 부르고 있다. 문섬과 같이 제주특별자치도 지방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3.10. 모도리코지

문섬 남동쪽 모서리이다. ‘모도리’는 상어류를 말하며 ‘빗게’의 일종이다. 산란기에는 모도리들이 와 산란을 하였고 이 틈을 이용해 어부들이 많이 잡았었기 때문에 ‘모도리코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에서부터 새섬 동 방파제가 시작된다.

3.11. 새섬목

새섬 방파제 끝과 새섬 사이를 말한다. ‘목’은 입구의 제주어이다. 범섬쪽으로 항해하는 풍선들이 즐겨 다녔던 목으로서 ‘새섬목’이라 부른다. 썰물 시에는 이곳을 통해 걸어서 새섬으로 올라갈 수가 있다.

3.12. 담머리코지

‘새섬목’ 바로 서쪽 바위이다. ‘담’은 돌 등을 이용해 쌓아놓은 보호 시설물을 가리킨다. ‘머리’는 맨 위쪽 또는 꼭대기를, ‘코지’는 곶의 제주어이다. ‘담’처럼 암벽이 형성되어 있기때문에 불려진 이름이다. 폭풍이 몰아칠 때의 파도치는 모습이 일품이다.

사진속 제주 다시보기 [ 서귀포항]


4. 인터넷 속 이야기

[출처] * [[[다음블로그] 이국적인 멋이 깃든 서귀포포구 - 수전포]]
포구순례 - (106)
제주를 관광하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명소 중의 하나가 서귀포 천지연폭포이다.
사시사철 맑은 물이 철철 넘쳐 흘러내리고 폭포 진출입로 양쪽으로 늘어선 우거진 수목들이 마치 원시림을 연상케 하는 천혜의 관광명소이다.
이 천지연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은 큰 하천을 이루면서 새섬 앞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이 계곡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옛 정취를 품에 안은 포구가 하나 있으니 바로 서귀포의 옛 포구인 수전포이다.
이 수전포는 서귀포의 옛 포구로 인근 새섬이 자연포구의 대들보이다.
옛 이름 '수전포'는 수전소가 자리잡았기 때문에 '수전포'이다.
지형이 새섬을 가운데 두고 동모와 서모 두 갈래로 들어오는 물이 마치 물싸움을 연상케 하여 수전포라 불렀다 한다.
[Photo] 멀리 새연교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수전포 전경이다.▼
파일:수전.jpg

5. 사람들 속 이야기


수전포구 : 서귀항

  • [뱃머리 마을 ‘포구’ 생활사 ]
{{{#!folding 나는 1960년에 뱃머리 마을 태어나서 대학 졸업할 때까지 살았어요 ▼
이제는 마을이 없어졌지만, 칠십리교 바로 끝에서 칠십리로가 이어진 곳, 그러니까 서귀펌프장 근처에 우리 집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 앞으로 배들이 한두 척 있지만 나 어릴 때는 우리 집 앞으로 배가 한 10~20척은 있었어요. 큰 배는 아니구 그저 자그마한 풍선들이었죠. 큰 배들은 마을 포구 옆쪽으로 서귀포구에 있었구요. 풍선은 보통 한 척에 3~4명 정도가 탈 수 있는데, 주낙이라고 낚싯줄에 여러 개의 낚시를 달아서 물고기를 낚아서 생계를 이어 왔어요. 옛날에 서귀포시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쪽밖에 없었어요. 여기는 농사지을 땅도 없고 하니까 거의 어부였어요. 그래서 우리한테 포구는 생업 그 자체였어요. 고깃배들이 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모여들어요. 특히, 자리 배는 만선이 되면 고동을 불려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막 풍선 주변으로 몰려가서 막 사다가 팔기도 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번쩍 등짐으로 져가서 생물로도 팔았어요. 그때는 냉장시설이 좋지 않으니까 배 갈라서 말려서도 많이 팔았어요.

중학교 이후부터는 동력선들이 많아지니까 그때부터 마을의 어선들이 줄어들고 서귀항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지형적으로 우리 마을 포구는 물때에 맞춰서 나갔다가 물때 맞춰서 들어와야 하고 수심 자체가 낮으니까 큰 배는 못 들어왔어요. 지금 보면 배가 한 두 척 있기도 한데 물이 빠지면 배가 갯가에 빠져 있지요. 여기가 해수면이 낮고 조수의 차가 있다 보니까 물이 빠지면 다 갯가였거든요. }}}

* [천지연무태장어]
{{{#!folding 원래 천지연에는 무태장어라고 민물장어가 살아요. ▼
점박이처럼 몸통에 점이 되게 많고 크기가 엄청 커요. 이놈들은 바다로 나갔다가 오는 그런 회유를 안 하고 한 자리에 가만히 사니까 껍질이 아주 두터워요. 나 어릴 적에 내 허벅지만한 놈을 봤는데 감귤 컨테이너 하나에 꽉 들어가더라구요. 한번은 무태장어가 떼로 죽은 걸 본 적이 있어요. 옛날 천지연 위쪽으로 고구마로 포도당 만들던 공장이 있었는데 여기서 비가 많이 오는 날 오수랑 막 찌꺼기를 내보내니까 거기에 휩쓸려서 막 죽었어요. }}}

* [칠십리교와 옛 추억]
{{{#!folding 지금 칠십리교보다 앞쪽으로 징검다리가 있었어요. ▼
지금 저 상가들 있는 쪽 공연장 그 위로 남성마을이 있었는데 거기 사는 애들이 서귀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여기 징검다리를 건너서 가는 길이 지름길이었어요. 비가 많이 와서 징검다리가 물에 잠기면 저 위에 천지연 폭포 위를 돌아서 학교에 가야 하는데 먼 길이지요. 여기에 즐거운 기억들이 많아요.

내가 중학교 때 굴삭기를 해 가지고 여기 갯가를 전부 팠어요. 여기가 천지연에서 물이 계속 내려오고 하니까 자갈돌이 엄청 많았어요. 그 자갈들 전부 트럭들이 실어서 공사장으로 간 거지요. 그때는 법이 없으니까 공사업자들이 막 파내서 팔거나 또 돈 주고 사고 그랬을 거예요. 돌도 많지만, 여기가 저 한라산에서 솜반내 거쳐서 천지연 폭포로 물이 떨어지니까 낙엽이며 뭐며 퇴적물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수면도 낮아진 거죠. 저 칠십리교가 두 번이나 무너졌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런 퇴적물에 대한 생각 없이 다리를 올렸다가 그렇게 되걸로 알아요. 지금은 시추봉을 이용해서 아주 깊고 단단하게 다리를 만드니까 그런 일이 없지요.}}}
  • [뱃머리 마을 아이들의 추억]
{{{#!folding 예전에 천지연 쪽으로 큰 돌이 있었는데 거기를 ‘내팡’이라고 불렀어요. ▼
냇가에 큰 돌이다 해서 내팡이라 했는데 거기서 친구들이랑 매일 수영을 했어요. 거기에 돌들이 많아서 물이 졸졸 내리니까 미끄럼 타면서 신나게 놀았지요. 천지연 물은 이 근방 생활수였어요. 그 물로 빨래도 하고 목욕도 했어요. 먹는 물은 저 생수궤라고, 거기 옛날에 사람도 살았다고 하는데 거기서 물이 나서 식수로 먹었어요. 물이 정말 많이 났는데 저쪽에 호텔 생기면서 거기랑 연결하고는 물이 안 났어요. 그리고 지금 주차장 앞쪽으로 전부 ‘내밧디’라고 불렀는데 논이었어요. 이 근처는 물이 풍부해서 저 상가며 주차장 저쪽으로 다 논이었어요. 논에 추수가 끝나면 친구들이랑 축구 하면서 막 뛰어 놓았어요. 그 논 주인을 아는데 일본 사시는 분인데 그 땅을 서귀포시에 기부했다고 들었어요. 그때가 1979년인가? 1983년도인가? 하여튼 그 무렵 이쪽 주변을 정비하면서 마을이 싹 없어졌어요.

지금은 천지연 물 내려오는 곳을 댐처럼 막아서 옛날보다 물도 깊어지고 민물이 들어와도 서로 섞이지 않지만, 우리 어릴 때는 바닷물이 매표소 전에 있는 돌다리까지 올라왔어요. 지금도 물이 빠지면 갯가나 드러나요. 물이 쫘 악하고 빠지면 여기서 맨발로 보말도 잡고 조개도 잡았어요. 그때는 소라가 참 많았어요. 그때 여기 실뱀장어들이 엄청 많았어요. 한 마리에 50원씩이었는데 팔기도 하고 했던 추억이 있었어요. 여기 다리 저쪽으로 주차장 들어오기 전까지 잡았으니까요.

물이 깊이 빠지는 날에는 새섬으로 올라가서 놀거나 바다 모래펄에서 놀았어요. 새연교가 없었을 때는 새섬이 방파제로 연결이 되어 있었어요. 물이 차면 못 가고 물이 빠지면 방파제가 드러나서 걸어서 갔어요. 지금도 새연교 밑으로 방파제가 남아 있을 거예요. 어릴 때 새섬은 나무가 거의 없고 띠라고 ‘새’가 많았는데 가서 새도 해오고 ‘삥이(삘기)’도 뽑았어요. 그러다가 물때 놓쳐서 방파제가 잠기면 그냥 물에 풍덩하고 헤엄을 쳐서 집에 왔어요. 한 10m 정도는 되었을 거예요. 그때가, 한 열 살 때였어요. 그때는 그렇게 자연과 노는 게 일이었어요. }}}


6. 기사 속 이야기

  • 제주의 포구③ 수전포 “두 갈래 해류가 마치 ‘물싸움’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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