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의 축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정진도(축구선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형백(亨伯) / 송담(松潭) |
출생 | 1852년( 철종 3) 3월 9일 |
경상도
청송도호부 부남면 대전리 (현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대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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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3년 12월 30일 (향년 51세)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보현산 | |
본관 | 경주 정씨[1] |
묘소 |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대전리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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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심의환 전 총무처 장관은 그의 외손자이다.
2. 생애
1852년 3월 9일 경상도 청송도호부 부남면 대전리(현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대전리)에서 아버지 정지득(鄭址得, 1814. 3. 17 ~ 1888. 1. 12)[2]과 어머니 평산 신씨(1829. 9. 18 ~ 1886. 7. 25)[3] 신필중(申弼重)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896년 1월 안동부 청송군에서 심성지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한 뒤 이어 청송의진이 결성되자, 여기에 입대하여 진무장(鎭撫將) 및 중군(中軍)에 선임되었다. 그해 4월 청송의진이 김하락이 이끄는 이천(利川) 의진, 김상종(金象鍾)이 이끄는 의성 의진과 연합하여 현내면 감은동(현 안덕면 감은리) 뒷산 기슭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교전했을 때, 이에 중군장 김대락, 소모장 심능장, 참모장 오세로(吳世魯) 등과 함께 60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참전하였고, 병사 7~8명을 사살하여 승리하는 데에 일조했다.
그 뒤 부동면 상평동(현 주왕산면 상평리) 마평(馬坪)과 경주군 등지에서 교전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고, 얼마 뒤에 좌익장 권성하 등과 함께 영덕의진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의진이 곧 해산되었다.
의진이 해산된 뒤에는 청송군 현서면 보현산에서 은거하다가 1903년 12월 30일 별세했다.
2004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