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6 09:21:39

정로식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참고문헌

1. 개요

조선유학생 2.8독립선언, 3.1만세운동, 민립대학건립운동에 중추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 농촌계몽운동가, 조선 판소리 모음집인 <조선창극사>를 저술한 저술가

2. 생애

1891년 12월 28일, 전라북도 김제 만경에서 태어났다. 1904년부터 한하문과 역학을 배웠으며 1914년 4월, 일본 메이지대학으로 유학하여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으며 1922년 4월, 조선청년연합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43년 9월에 다시 체포되었다. 1945년, 8.15 해방으로 석방되어 서울시인민위원회 고문으로 일했고 1946년 3월, 신민당 중앙본부 협조부장, 1946년 12월, 남로당 1기 중앙위원회 위원 및 소비조합부장에 선출되었으나 1948년 4월에 다시 체포되어 11월까지 복역했다.

이후 월북하여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49년에 남북로당이 합당되면서 조선로동당 2기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편입됐을 것도 같은데 당시 중앙위원회 목록이 없어서 확신은 할 수 없다. 1951년 1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51년 3월, 조국전선 의장이 되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6월,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9년 5월, 김창준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5년 7월 12일 3시에 75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조국전선, 조평통,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선생은 해방 직후부터 우리 나라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민족 분렬 책동을 반대하기 위한 투쟁에 헌신하였으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 및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의 중책을 지니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과 사회주의 건설 위업에 정력을 다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1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