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22 16:38:18

적계여랑

<colbgcolor=#00A6A9> 백제국 귀족
이름 적계(適稽)?[1]
별명 이케츠히메(池津媛)[2]
직급 우네메(采女)[3]
생몰연도 ? ~ 458년 음력 7월
가족관계 어머니 모니부인

1. 개요2. 관련 기록3. 관련 연구

[clearfix]

1. 개요

백제의 인물. 국내기록에는 없고 《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기록을 종합해보면 개로왕 즉위 이후 일본으로 파견되어 유라쿠 덴노의 궁녀가 되었는데, 이시카와노 타테(石川楯)라는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다 발각되어 458년 7월 화형에 처해져서 사망했다. 이를 소위 우네메(采女) 사건이라 하는데, 이리 불리게 된 것은 그녀에게 우네메의 직급이 주어졌기 때문.

백제 측이 이 사실을 언제 파악했는지는 불명. 다만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61년 4월 개로왕 부여곤지의 대화 기록이 실려있는데, 개로왕은 적계여랑이 화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여자를 보내는 걸 금지하고 대신 부여곤지를 일본에 파견해 천황을 섬기게 했다고 서술했다. 아무튼 적계여랑 이후로는 사절로는 남성만 파견하게 된 것이 된다. 적계여랑이 사망하고 3년 뒤, 461년 개로왕은 아우인 부여곤지를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그 외에 실제 개로왕의 즉위는 455년의 일인 점을 감안하면, 적계여랑의 도왜 시기는 429년경이 아닌 455년 ~ 458년 사이의 일로 추정된다.

2. 관련 기록

2년 가을 7월 백제의 이케츠히메(池津媛)는 천황이 장차 동침(同寢)하려는 것을 거스르고, 이시카와노 타테(石川楯)[옛 책에서는 이시카와노 코무라노 오비토(石河股合首)의 조상 타테(楯)라고 한다][4]와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오오토모노 무라야노오오무라지(大伴室屋大連)[5]에게 명하여 쿠메베(來目部)를 시켜 부부의 사지(四支)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 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백제신찬》(百濟新撰)은 “기사년(己巳年: 429년)[6]에 개로왕(蓋鹵王)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아레나코(阿禮奴跪)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을 꾸며 적계여랑(適稽女郞)이라 하고 천황에게 바쳤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14 <유랴쿠 덴노>

3. 관련 연구

  • 김수태, 5세기 후반 백제의 대외관계와 남조(5世紀後半 百濟の對倭關係南朝) 2011

[1] '적계여랑'(適稽女郞)에는 '챠쿠케이 에하시토'라는 훈이 달려있는데 '챠쿠케이'는 '적계'를 그냥 그대로 음독한 것이고 '에하시토'는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 훈으로 아가씨와 관련있는 단어로 추정된다. 즉 이는 '적계 에하시토'가 되는데 현대어로 바꾸면 '적계(適稽) 아가씨'란 뜻이 된다. 여기서 '에하시토'야 당연히 존칭이고 '적계'는 본명이거나 별명 혹은 존칭을 나타낸 것이 된다. [2] 못(池)의(津, 연결 조사) 여인/공주(媛)라는 뜻이다. '히메'는 딱히 공주에게 한정해서 쓰이던 말이 아닌 여성 귀족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던 존칭으로 이케츠히메 또한 당연히 본명은 아니고 일본측에 의해 주어진 별명. [3] '우네메'란 일본 궁중에서 천황과 황후의 식사 등 자잘한 가사를 가까이서 도맡던 궁녀의 직급이다. [4] '이시카와'가 성씨에 해당하는 우지, '오비토'는 성씨의 등급을 나타내는 가바네, '코무라'는 이름. [5] '오오토모'가 우지, '오오무라지'가 가바네, '무라야'가 이름. [6] 실제 개로왕의 즉위는 429년이 아닌 455년이다. 《백제신찬》의 기록 오류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