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상희(相喜) |
본관 | 원주 이씨[1] |
출생 | 1886년[2] |
전라도
무주도호부 풍동면 마곡리 (現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마곡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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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사망년도 미상 |
사망지 미상 | |
묘소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금척마을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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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86년 전라도 무주도호부 풍동면 마곡리(現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마곡마을)에서 아버지 이시옥(李時玉, 1841. 3. 15. ~ 1882. 7. 14.)[3]과 어머니 연안 이씨(1849. 8. 1. ~ 1925. 12. 13.) 사이에서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무주군 풍동면 금척리(現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금척마을)[4]으로 이주했다.일찍이 대한제국군에서 3년간 복무한 바 있으며,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단행되자 그해 11월 전라북도 무주군 풍동면 소숙방산(少宿方山)에서 이장춘이 이끄는 수십 명의 의병을 만났고, 그들의 권유에 따라 의병진에 입대했다. 12월 잠시 귀향했다가 1908년 3월 다시 의병진에 복귀해 그해 4월까지 한 달간 무주군 일대에서 무장한 채로 의병활동에 필요한 땔감을 채취하고 군수품을 운반했으며, 훈련장(訓練將)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 육군에 활동상이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1908년 8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형법대전 제195조에 의거, 내란 혐의로 유기 유배형 3년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직후 공포된 메이지 43년(1910) 칙령 제325호 대사령에 의해 특별사면을 받아 출옥했다.
출옥 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 사망지 등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32세 종(鍾) 항렬. 족보명은 이기종(李起鍾).
[2]
원주이씨대동보 권2 748쪽에는 1878년 6월 23일생으로 등재돼 있다.
[3]
자는 탁여(琢汝).
[4]
1908년 8월 7일 1심 판결문에는 당시 풍동면 쇠현(釗峴)에 거주한다고 기재돼 있는데, 금척마을의 다른 이름이 쇠재마을이고 쇠재가 곧 쇠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