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 |||
출생 | 1905년 12월 11일 | ||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의곡리 99번지의 1 | |||
사망 | 1932년 8월 18일 | ||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천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2묘역-1036호[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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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이상조, 어머니 최학동 | |
형제자매 | 형 이만근, 동생 이도근 | ||
배우자 | 최귀연 | ||
자녀 | 딸 이활, 아들 이영 | ||
학력 | 대구사범학교(졸업) |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수여), 대통령표창(198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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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경북 경주시 사람이다.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청리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노래를 가르치는 등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26년 8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고향에서 형인 이만근과 함께 유봉조·김재홍 등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독립을 목적으로 산내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유봉조에게 보낸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편지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일로 인하여 1927년 10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서 조선청년총동맹 산하 경주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1927년 2월에 결성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경주지회를 조직하여 선전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농민회를 결성하여 항일활동을 폈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30년 7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동년 9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있다.
3. 여담
1926년 8월 이만근·이중근 형제에 의해 산내청년회가 결성된 의곡공립보통학교는 개축되어 현재 의곡초등학교 부설 병설유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독립운동사적지라는 안내판 조차 설치되어있지 않다. 기사4. 참고자료
-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사이트 - 1926년 8월 이만근·이중근 형제에 의해 산내청년회가 결성된 곳의 사적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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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독립운동가의 사진 찾기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프로젝트 기사
본 문서를 보면 대표 사진이 없는데 아직 존영을 찾지 못 했기 때문이다. 관련 정보를 알고있는 사람은 위 기사에서 요청하는 메일 주소로 누구나 제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