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경주 이씨 |
출생 | 1890년( 고종 27) 4월 9일 |
충청도
태안군 안상면 승언리 (현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91번지)[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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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7년 6월 18일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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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0년 4월 9일 충청도 태안군 안상면 승언리(현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91번지에서 아버지 이규삼(李奎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일찍부터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고 있었는데, 마침 정3품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김병년(金炳䄵)이 안상면 승언리로 낙향하여, 신교육을 통해 조국광복을 꾀하고자 1906년(광무 10) 12월에 광영신숙(廣英新塾)이라는 신교육기관을 세웠다.
이때 이종헌은 한문 공부를 그만두고 새로 세운 광영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여 1918년 본교를 졸업하고 이에 모교의 교사로 취임했다. 모교의 교사가 된 이종헌은 남달리 애교심과 사명의식이 투철하여 후진 교육에 최선을 다하였음으로 학교는 나날이 발전해 갔다.
그 뒤 그는 1918년 3월 적극적인 애국활동의 실천과 독립운동 자금조달의 목표 달성을 꾀하기 위해 대한독립청년단 안면도지단을 조직하고 태안면· 부석면·남면 등 서산군 일대의 애국지사들을 순방해 단원으로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가재창· 오몽근(吳夢根)·임정호(林楨鎬)·염성환(廉星煥)·편무연(片茂捐)·이재국(李在國)·박준용(朴準用)·박봉래 등을 단원으로 가입시켰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관이던 서병철(徐丙轍) 등에게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잔인한 고문을 받았으며, 1920년 10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위반 및 사문서 위조 행사, 공갈, 강도 등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미결 구류일수 60일 통산)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으나,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위반 및 공갈, 사문서 위조,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를 취하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따라 초대 안면면장으로 추대되어 면민 복지증진에 주력했다. 이후 1957년 6월 18일 타계하니 향년 67세였다.
지난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으며, 1982년 고향인 안면읍 승언리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