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3 16:25:35

이인의화

파일:종교표지_원불교_검은색.png
원불교 대각여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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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224> 원불교 대각여래위
이인의화
李仁義華 | Lee Ineuihwa
파일:대타원 이인의화.jpg
출생 <colbgcolor=#fff,#121212> 1879년 2월 8일
전라북도 전주시
사망 1963년 4월 21일 (향년 94세)
법호 대타원(大陀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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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224><colcolor=#221f20> 대각여래위 추존 2024년 5월 7일
속명 이인자(李仁子)
출가 1935년 7월 }}}}}}}}}

1. 개요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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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불교 역사상 최초의 재가 여성 대각여래위.[1] 대타원 종사는 정산 종사 특인으로 교단 제1대 역사 내 유일의 생전 법강항마위에 오른 인물이다.

2. 일생

대타원 이인의화 종사는 1897년 2월 8일,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아버지 이영직과 어머니 김 씨의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후 16세에 결혼을 해 전주 박씨 가문에서 6남매를 자식을 두었다. 29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34세에 6남매를 데리고 이리 김씨 문중에 재혼하여 음식점으로 큰 재산을 모았으나 토지 사기꾼에게 속아 많은 빚을 지게 됐다. 마지막 남은 일곱식구 식량을 밑천 삼아 숙박업으로 재기하였으나, 다시 3남의 사업 실패로 가정이 파탄되어 삶의 회의감이 들었다. 이후 기도도 해보고, 바른 공부길을 찾고자 방황하다가 경타원 최수인화 교도의 연원으로 원기 20년(1935년) 7월, 54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만나 귀의하였다.

원기 38년(1953년)에 열린 교단 제1대 성업봉찬대회에서 공부성적 법강항마위, 사업성적 1등으로 원성적 정1등 3인 중 제1호의 인물이다. 대종사 당대에는 생존자로서 법강항마위 법위를 인정받은 제자가 없었다. 이러한 전통은 정산 종규 종사 당대 초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정식 법강항마위에 오른다는 것이 출가 수행인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타원 종사는 금기를 깨고 정산 종사로부터 제1대 내에 정식 법강항마위 특인을 받았다. 이는 현재도 유일한 기록이며, 대타원 종사의 그 공부 정도와 법력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대타원 종사는 공부 방면만이 아니라 원불교 초창기의 사업에도 큰 공적을 쌓았다. 이리시 동산동 땅 1,000평을 매입해 이중 300평을 교단에 희사하였다. 희사한 땅으로 중앙선원(현재 원불교 중앙총부 내 동산수도원)이 문을 열어 교단 초기 교역자 교육을 담당했고, 이어 예비교무 양성기관인 동산선원(고등선원)[2]이 설립되어 원광대학교 교학대와 함께 교단의 인재양성에 큰 힘을 보탰다. 또 이리시 마동에 대지 142평과 건물 3동을 희사해 이리교당이 창설되었다.

원기 48년(1963년) 3월 11일 법랍 27년, 세수 94세로 사망했다. 원기 76년(1991년), 소태산대종사탄생백주년기념대회에서 종사 법훈이 추서되었다.


[1] 여성으로서의 대각여래위는 용타원 서대인 종사 이후 두 번째이며, ‘재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다. [2] 영산선학대학교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