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여빈(李汝馪), 1556 ~ 1628조선 중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의 한 사람이다.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沙), 감호, 감곡 등이고, 본관은 우계(羽溪).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최초의 향토지인 영주지를 편찬하였다.[1]
2. 생애
1556년 경상도 영천군(榮川郡)[2] 도촌(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3]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수형의 아들 이대근의 손자인 경기전참봉 이효신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효령대군 이보의 4대손 사직 이귀윤의 딸이다. 그의 외가는 외증조부 황려부정 이종 때 경상도로 내려왔다.진사 한우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다가, 나중에 소고 박승임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박승임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고, 박승임의 문하생들 중에는 이여빈의 7촌아저씨인 이효린도 있었다.
159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임진왜란이 터져 의병대장 김개국 휘하의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때 의병과 경상북도지역 관군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160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벽사도찰방에 부임하였으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부임 1년만에 사퇴하였다.
이때 유학자 5현의 문묘 종사에서 자기들의 스승 남명 조식이 탈락한데 앙심을 품은 북인 당에서 퇴계이황과 회재이언적을 헐뜯자, 이여빈은 퇴계 회재의 업적을 칭송하는 퇴계회재 양선생변무상소를 올리고, 이이첨과 정인홍, 상궁 김개시 등을 질타하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했다.
1614년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1617년 김직재의 옥사와 인목대비가 의인왕후를 저주했다는 말 등이 나와 인목대비 폐모론, 영창대군 처벌론 등이 나왔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계통상 모자이고 형제이니 용서할 것을 청하는 전은소를 지어올리고 궐문 앞에서 일주일간을 엎드려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단념하고 영주 부석면 감곡으로 낙향, 시문과 문인 양성에 전념하였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잠시 안동향교, 진주향교의 제독을 지내기도 했다. 만년에 지역의 사료를 모아 영주지역 최초의 향토지인 영주지를 완성하였으나, 병으로 간행을 못보고 인수정 정침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