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리수 李愛利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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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8787><colcolor=#fff> 본명 | 이음전 (李音全)[1] |
출생 | 1910년 1월 1일 |
경기도 개성시 | |
사망 | 2009년 3월 31일 (향년 99세) |
학력 | 호수돈여학교 (졸업)[2] |
가족 | 배우자 배동필, 슬하 2남 7녀 |
데뷔 | 1919년 신파극단 신극좌[3]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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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시절에 활동했던 한반도의 연극배우, 가수.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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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 |
1910년 1월 1일, 경기도 개성시에서 출생했다. 외삼촌인 희극배우 전경희의 영향을 받아 유년 시절인 9세가 되던 해에 신파 극단인 신극좌에 입단하여 데뷔하면서, 배우 및 가수로 활동하며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고, 1922년 민중극단을 거쳐 18세에 취성좌(聚星座)라는 극악단에서 ' 황성옛터'를 불렀고, 1931년에는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음반을 발표해 50,000장을 판매했다. 당시엔 오디오가 엄청난 고가의 물건이라 이를 보유한 가구가 적었던 시절이었으므로 50,000장은 엄청난 양이었다.
1932년에 연희전문학교의 재학생이었던 배동필과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씨 집안에서 심하게 반대를 했다. 그러자 그녀는 급기야 1933년 음독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배씨 집안이 결혼을 허락해 슬하에 2남 7녀를 두게 되었다. 결혼 조건으로 연예계 은퇴를 요구했기 때문에 1930년 조선연극사, 1932년 태양극단, 1934년 4월 마지막 음반인 <꽃각시 설움> 발매하고 이후로 은퇴했고, 이후로는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삶을 살며 배동필과 해로했다.
그래도 남편 배동필이 공장을 운영했었기 때문에 여유있는 삶을 산 것으로 보였지만, 1950년 6.25 전쟁으로 한동안 가세가 기울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1960년대까지는 "가정주부로 지내고 있다"는 식의 근황이 나오곤 했지만, 노년기가 되면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이애리수 본인과 가족들이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이유로 TV 방송 출연과 언론 인터뷰 요청을 지속적으로 거절했었다. 자식들도 "어머니가 직접 '과거에 가수 활동을 했다'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가수였던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다.[4]
이후로 안산시로 이주하며 큰아들과 함께 살았고, 한복을 입고 산책을 하곤 해서 동네 주민들에게 '한복 할머니'로 알려진 듯하지만, 이애리수가 가수 활동한 지 너무 오래된 탓에 눈치를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1990년대, 그러니까 이애리수가 당시 기준으로 80대에 들어선 시점에는 이미 고인으로 인식되어왔다.[5] 그렇게 이미 고인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2008년에 경기도 고양시 소재 요양병원에서 생존해 있음이 전해진 후 다큐멘터리 촬영을 고사하였고 그러던 중 다음 해인 2009년 3월 31일 해당 요양병원에서 향년 9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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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리수 '황성옛터' |
3. 대표곡
- 황성옛터 - 원래 제목은 '황성의 적'이다.
- 메리의 노래
- 고요한 장안
4. 여담
- 본명이 이보전(李普全)으로 잘못 알려진 적이 있었다.
- 예명인 애리수는 서양식 이름인 앨리스(Alice)를 한국식으로 쓴 것이다.
[1]
한 때 이보전(李普全)이란 이름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었다.
[2]
참고
[3]
9살 무렵부터 배우 및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
[4]
큰아들인 배두영이 대학교 3학년이 돼서야 알게된 것을 볼 때, 아마 자녀교육 때문에 자신이 가수 활동한 것을 말하는 것을 원치 않은 듯하다.
[5]
1991년에 열린 25주년 가수의 날 기념행사에서 작사가
반야월이 고복수, 백년설, 이난영 등과 더불어 고인으로 언급했는데, 당시 그녀의 근황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보니 가요계 일각에서는 이미 고인인 것으로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