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이신언(李愼言) 호(號) 중인(仲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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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 | 이신우(李申佑) |
관향 | 원주(原州) |
출생 | 선조 33년 1600년 |
사망 | 현종 13년 1672년 |
관직 | 증통정대부(贈通善大夫) |
배(配) | 숙부인(淑夫人)도강김씨(道康金氏) |
슬하 | 2남4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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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름은 이신언(李愼言)이며 호(號)는 중인(仲認)이다.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이영화(李英華)의 곤손(昆孫)이고, 증통정대부(贈通善大夫)행호조정랑(行戶曹正郞) 이광일(李光一)이다.
2. 일생
이신언(李愼言)은 아버지 이광일(李光一)과 어머니 숙인(淑人)청주김씨(淸州金氏) 칠원부사(漆原府使)윤백추(尹白秋)의 따님 사이에서 2남 중 둘째 아들로 1600년(庚子) 선조(宣祖 33년)에 태어났다.신언(愼言)은 천성(天性)이 충실(忠實)하고 순박(純朴)하여 가통(家統)인 순효(純孝)를 이어받아 부모상(父母喪)에 슬퍼하는 것이 예절(禮節)에 넘쳤으며, 효종(孝宗)이 승하(昇遐)하자 부모(父母)의 상(喪)과 같이하여 나이가 60이 넘었음에도 죽과 소금과 채소로 3년 동안을 한결같이 지냈으며,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에도 나이가 70이로되 효종(孝宗) 상(喪) 때와 같이 함에 사람들이 그 슬퍼하고 괴롭게 지내는 것이 몸을 해칠까 걱정하니 신언(愼言)은 “이것이 우리집에 전(傳)해오는 가풍(家風)이니 늙었다고 그만 둘 수는 없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3세(世)에 걸쳐 귀신도 울리고 사람을 놀라게 하는 효행(孝行)이 알려져 조정(朝廷)에서는 1714년에 삼세효자(三世孝子)의 정문(旌門)을 내리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장하기도 하여라! 아, 사람이 은혜(恩惠)를 입음이 부모(父母)보다 더 큰 것이 없거늘 그러기에 사람이 사회(社會)에 얼굴을 내밀려면 집안에서 먼저 효도(孝道)부터 해야 할 것이다.
집안에서 효도(孝道)를 다하지 못하면서 사회에 다른 봉사(奉仕)나 활동(活動)을 한다는 것은 이는 가식(假飾)에 지나지 않는다 하겠다.
해남(海南)의 원주이씨 삼세(三世)야 말로 아홉 충신과 더불어 집안의 자랑이요, 나아가 우리 온 겨래의 귀감(龜鑑)이 아닐 수 없다.
전적(典籍) 함평(咸平) 이삼령(李三齡)이 글을 짓다.집안에서 효도(孝道)를 다하지 못하면서 사회에 다른 봉사(奉仕)나 활동(活動)을 한다는 것은 이는 가식(假飾)에 지나지 않는다 하겠다.
해남(海南)의 원주이씨 삼세(三世)야 말로 아홉 충신과 더불어 집안의 자랑이요, 나아가 우리 온 겨래의 귀감(龜鑑)이 아닐 수 없다.
3. 상훈과 추모
아버지 이문길과 더불어 아들 이광일, 손자 이신언도 대를 이어 효행이 지극하자 1714년(숙종 40) 조정에서는 이문길에게 예조참의, 이광일에게 호조정랑, 이신언에게 통정대부를 증직하고, 출생지인 화산면 탄동리에 원주이씨삼효문(原州李氏三孝門)이라는 정각을 하사하였다.1926년 후손들이 마산면 화내리 영산사(英山祠) 아래편으로 이건하였다.
비각(碑閣)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 형태이며, 비(碑)는 높이 115㎝, 너비 35㎝, 폭 15㎝로 세 개가 있다.
비명(碑銘)은 “증통정대부예조참의충효원주이문길지비(贈通政大夫禮曺參議忠孝原州李文吉之碑)”, “증통선호조정랑효자원주이광일지비(贈通善戶曹正郞孝子原州李光一之碑)”, “증통정대부충효원주이신신지비(贈通政大夫忠孝原州李愼信之碑)”라고 적혀 있다.
4. 참고문헌
원주이씨대동보(1991년)여지도서(輿地圖書)
문화유적분포지도-해남군(전라남도 해남군·목포대학교박물관, 2002)
우리마을의삶과문화편찬위원회, 『우리 마을의 삶과 문화』상(해남문화원, 2011)
해남군지 중(해남군지편찬위원회, 2015)
해남군지 하(해남군지편찬위원회, 2015)
해남읍지(명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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