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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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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福男
1555년 6월 28일 ~ 1597년 8월 16일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의 장군. 본관은 우계(羽溪) #[1].

이광식의 증손이며 지중추부사 이전의 손자로 흥덕현감, 갑산부사를 지낸 이준헌(李遵憲)의 차남이며 아버지 이준헌은 일찍 요절하였다.

누이 중 한명은 윤근수의 아들 윤환에게 시집갔다. 친하게 지낸 인물로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있다.

1588년( 선조 12) 식년시 무과에 병과 18위로 급제하고 # 선전관, 별장 등을 지냈다. 무인을 불차채용할 때 추천을 받았다. 1592년 나주판관이 되고 그해 도복병장을 겸직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김제군수 정담,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전주 웅치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승리했고, 안덕원에서도 왜군을 격파했다. 그 공로로 당상관에 승진해 팔량신성의 수비를 맡았다.

1593년 전라방어사, 전라조방장이 되었다가 조선과 일본이 종전협상을 하는 동안 권율의 휘하에 배속되어 경상도 창녕으로 가 대기하였다.

그 뒤 충청조방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병으로 이시언(李時言)과 교체되었다가 1593년 12월 다시 충청조방장이 되었다. 1594년 9월 남원 부사 겸 전라조방장, 1595년 1월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95년 문초를 가하다가 죄인이 죽어 어사로부터 남형(濫刑)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곧 복직, 1596년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전쟁 중 군마를 꾸준히 훈련시킨 공로로 선조에게 붉은 비단을 하사받았다. 1597년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재임명되었다. 1597년 4월 해안가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막으려고 5000명 군사를 이끌고, 순천 해안가로 내려갔다가 남원성 함락 소식과 명나라군 부총병 양원의 지원 소식을 듣고 말머리를 돌려 광양, 진상 등을 거쳐서 남원으로 갔다.

1597년 8월 이미 남원성은 함락되었고 일본군 5만 8천명이 주둔중이었다. 성앞에 도착해 그는 '사나이,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가 이날이 아닌가'라며 태연한 척 나팔을 불고 행군하였다.

이복남은 죽음을 각오하고 접반사 정기원, 교룡산성별장 신호 등과 함께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15일간의 전투 끝에 병력 다수를 잃고, 그는 병사들에게 살고 싶다면 도망쳐도 된다는 말을 남기고 볏짚단을 쌓은 뒤 병사들에게 불을 지르게 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타던 말이 이복남의 갑옷과 투구를 물고 경기도 광주(현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있는 그의 집에 나타나 갑옷과 투구로 장례식을 치렀다. 바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04년 선무 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 숙종 때 다시 숭정대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1715년 충장공의 시호를 받았다. 아들 이경보[2]는 모리군에 잡혀 일본으로 잡혀가 리노이에 모토히로라는 이름으로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이 되었다. 이 사람의 후손 중, 메이지 시대에 해군조병총감을 지낸 해군중장 리노이에 마사타, JP모건 체이스의 일본 사업 책임자인 리노이에 테루가 있다.

[1] 충장공파 17세. 부사정공파의 지파인 충장공파의 파조이다. [2] 일본 측 기록에서는 이성현(李聖賢)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