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이민복 李民馥 | Lee min-bo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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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7년 |
황해도, 서흥군[1]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종교 | 개신교[2] |
가족 | 아버지 이포구(1925~1985), 어머니 |
배우자[3], 아들[4], 딸 | |
학력 | 평안남도 은산 농업전문학교 |
경력 |
남포농업대학 연구소 연구원 국가농업과학연구원 옥수수연구소 연구원 양강도 김정숙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연구원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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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 前 과학자, 농업기술자.1995년 2월 18일, 러시아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탈북하였다.
현재는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로 대북풍선 활동 등을 하고 있다.
2. 생애
2.1. 탈북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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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포구 씨(왼쪽), 그의 아들 이민복 단장(오른쪽) |
청년 시절 평안남도 은산군에서 전체 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쌀은 공산주의"라는 김일성의 교시에 마음이 움직여 쌀 믄제만 해결하면 공산주의가 실현된다고 믿었고 공대 대신 농업 분야를 선택해 평안남도 은산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했다. 1979년에는 남포농업대학 연구소로 옮겼고 1982년 국가농업과학연구원 옥수수연구소에서 깜부깃병[5] 전문가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85년, 남조선 간첩 혐의로 평생을 감시속에서 살던 부친이 “정치는 최대 협잡”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해 이 단장은 양강도에서 발생한 깜부깃병 퇴치 임무를 받고 양강도 김정숙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연구원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작황실험을 통해 개인농과 집단농의 차이가 수확량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중앙당에 개인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1호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과학원 국장이 내려와 “중앙당이 개인농은 수정주의라며 조사를 진행했다. 당신을 정치범으로 몰려다 순수한 과학자의 행동으로 봐주기로 했으니 더 고집부리지 말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연구로 인민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반동 사상으로 분류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김일성에 대한 굳건했던 믿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
이후 1990년 8월 강원도 철원에 출장갔다가 우연히 대북전단을 보게 되었고 점차 6.25 전쟁에 대한 의구심과 북한 체제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후 1990년 11월 1차 탈북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였고, 1991년 6월 재시도 끝에 압록강을 성공적으로 건넜다. 이후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서 1년을 머물렀고, 1992년 6월 러시아로 넘어가 생활하던 중 1995년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
2.2. 탈북 이후
탈북 후, 국정원 조사를 마치고 직업 전문학교을 다니며, 강연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모스크바에서 살던 시절 엠네스티 운동과의 인연으로 인권 운동을 자연스럽게 시작했다.1996년 안혁, 강철환 등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북한인권시민연합 창설 첫 멤버로 북한인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2003년부터 민간 차원에서 처음으로 대북전단을 담은 풍선을 북한으로 보내는 운동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현재는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3. 북한인권운동
민간 대북전단 살포의 1인자로 통한다. 본인도 이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다.본인이 대북전단에 의해 탈북의 동기를 가졌기 때문에 더욱이 이러한 대북전단의 중요성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선교사로 활동하며 이러한 활동을 사역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대북전단 물품은 주로 개신교 신자들의 후원금을 통해 구매하고 이루어진다고 한다.
다른 북한인권운동가들과 달리 의외로 보수정부 시절에도 비판을 많이 날린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처음으로 전단을 날린 이후 “대북정책 기조가 노무현 정부와는 나와 맞지 않았지만 인권을 침해하는 제재는 없었는데 오히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시절에 더 많은 인권 침해적 통제를 가했다.”며 2014년에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하기도 했다. #
또한 다른 탈북민 대북전단 활동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박상학 대표를 매우 비판하며 사이비 활동가라 지칭한다. 이 둘은 지향점 자체가 종교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으로 매우 다를 뿐더러 비교적 온건파인 이민복 대표에 비해 강경파인 박상학 대표의 활동이 오히려 대한민국애 피해를 주는 활동이라 이야기한다. 이 둘의 갈등은 매우 첨예하게 대립중이다. #
2021년 대북전단 금지법이 통과되자, 헌법재판소 앞에서 위헌 시위를 하였다. #
2023년 북한인권상 수상하였다.
4. 논란 및 사건사고
4.1. 대북전단 북한군 총격 사건
2014년 10월 10일, 경기도 연천군에서 이민복 대표가 날린 대북전단 풍선을 북한군이 고사포로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주민들이 반발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다시 남은 대북전단을 살포하려 했지만, 경찰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4.2. 공금 횡령 논란
2020년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자금유용 등의 혐의로 대북전단 살포단체 4곳을 경찰에 수사의뢰했다. 이 중 한곳으로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또한 지목되어 경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당시 대북전단 기부금이 단체의 돈벌이로 유용된더는 의혹이 언론들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횡령혐의로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고 결국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단체 3곳은 송치되었다.
다만, 이민복 대표는 수사결과 혐의없음으로 불송치 결정되었다. #
5. 어록
야..이거 한쪽 땅만 해도 참 다행이다. 북한처럼 됐더라면 어떻게 될까?
실력이 없으면 안되는 나라에요. 나의 분야에서는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거고 처음에 북한에서 상류 능력을 가지고 와보니깐, 초등학생보다 못한게 많더라고요. 영어 모르죠. 컴퓨터 모르죠. 그때 마음을 탁 낮췄어요. 새로 시작하자.
6. 여담
- 라면을 굉장히 좋아한다. 탈북 후 처음 맛 본 남한 음식이라고 한다.
- 북한 정권으로부터 협박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
- 의외로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 북한에서 군대를 가지 않으려면 출신성분이 좋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좋거나 혹은 공부를 매우 잘해야하는데, 바로 후자 케이스. 평안남도 은산군에서 전체 2등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