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3 20:09:21

이긍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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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조고의 내손자
이긍휴 | 李兢休
관직 사공(司空)
본관 전주 이씨
긍휴(兢休)
부친 이입전
모친 백씨(白氏)
부인 이씨(李氏)[1]
자녀 이염순 외 6남[2]
17대손 태조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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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국성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내손자.

2. 상세

이입전의 아들로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고려시대의 '사공'은 3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또 '정언'은 고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 벼슬로 종6품이었으며,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일을 맡았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일화가 곁들여 있다.
이긍휴는 중국에 건너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다가, 7년 후에 우리 나라로 돌아와 몇 해 동안 계셨다. 이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관사재(觀史齋)에 계시다가 객사하셨다. 이에 부인 이씨가 7세가 된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중국 조정에 밤낮으로 호곡하며 호소했다. 이때 완탑촌(完塔村)에서 자는데 밤에 꿈 속에서 6금불(六金佛)이 와 하는 말이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밑에 버려져 있다.” 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의 힘으로 시체를 찾고, 또 천자의 명으로 우리 나라로 모셔와 선영에 장례지냈다.

그리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적혀 있다. 이 두 책에는 이긍휴가 도민(道敏)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긍휴는 호탕하고 방랑벽이 있어 중국에 건너가 삼성문(三省門 : 三聖門)에서 수업(受業)하여 천문지리에 달통했고, 9년(또는 8년) 만에 귀국하여 시조의 묘를 향린산(香麟山 : 香因山)으로 이장한 후 훗날을 기약했다고 한다.



[1]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2] 《동국세기》및《충효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