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5년 음력 4월 29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안농리에서 부친 이윤규와 모친 광산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명숙, 호는 화사이며, 본관은 한산 이씨이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유학자 가문으로, 조부인 이영직은 고종 27년(1890)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는 등 학문으로 명망이 있었다. 또한 부친 이윤규는 역시 참봉을 지냈고, 유학과 효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관구는 어렸을 때 조부와 부친의 지도로 한학을 익혔고, 시와 문장에도 능했다. 이관구 본인이 저술한 <언행록>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때 강은식에게서 글을 배웠고, 정월 보름날부터 자치통감을 읽기 시작하여 6월 그믐날까지 전질 15권을 다 읽었다고 한다.1900년 유인석이 황해도 평산, 평안도 태천, 개천, 용천 등지에서 강학하였을 때, 이관구는 고향을 떠나 유인석을 찾아가 제자되기를 청해 허락을 받아냈고, 이후 그의 문하에서 힘써 공부했다. 하지만 유인석과는 달리 위정척사파로 남지 않았고, 계몽운동가인 박은식, 양기탁, 신채호, 장지연 등과 교류하여 신식 학문을 익혔고, 대한매일신보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대성학교에 다니면서 안창호의 훈도를 받았다. 그는 안창호와 가까이 지내면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또한 언행록에 따르면, 그는 조부로부터 독립의식을 고취받았다고 한다.
조부이신 가운께서 그에게 훈시하시었다. "사람의 독립정신은 입지에 있다. 뜻을 세우지 못하면 소위 학문이란 것은 도리어 사람을 상하게 하는 해물의 기구로 될 것인즉, 취할만한 것은 없느니라."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이관구는 크게 분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4~5개월 후 자퇴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난징의 상강실업학교를 거쳐 회문대학과 명륜대학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이 시기 무력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여 1911년 음력 3월 서간도에서 이시영 등과 함께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기획했지만 자금 2만원이 필요하여 일시 중지했다. 이후 절강성 항주부 군관속성과를 졸업한 뒤, 1913년 발발한 계축전쟁에 참전하여 실전을 익혔으며,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난징, 상하이, 홍콩, 만주, 연해주 일대를 두루 돌아다녔다. 이후 안창호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지만, 도중에 병을 얻어 하와이에 내린 뒤, 그곳에서 김성삼, 윤영국, 길운영 등과 회합하여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했다.
1913년 조선에 귀국한 뒤 황해도 해주군에서 머물면서 그해 음력 12월부터 1914년 음력 5월까지 청년 6명을 권유하여 하와이로 밀항시키고자 하였으나, 자금이 여의치 않아 실행에 이르지 못했다. 1914년 해주에서 황해도내의 유림인 이학회, 오순원, 이종문, 박행일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계획하고, 평안도의 유림과 서북간도의 중진인사들과도 연락하여 거의를 도모했다. 격문을 조선총독에게 보내고, 동포에게 포고문을 배포하기도 했지만, 거의 계획은 실패하고 1914년 음력 11월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중국 각지의 동지를 방문하여 결합을 도모하면서, "사람들은 입으로만 국권회복을 말하고 있다. 자금과 곡식의 준비가 결핌하여 실력이 없다.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금은을 저축하며 인물을 양성하고, 미리 빈민을 구제하여 인심을 수습하며, 사상의 통일을 도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규식이 주도한 동제사에 가입했다. 이 시기 박상진을 만난 이관구는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국내로 돌아와서 박상진의 고향인 경주로 갔다.
그의 구체적인 역할과 활동 양상에 대해서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의용실기> '유준희조'에 따르면 경성에서 금융연합회 이사장을 역임하던 유준희와 만나서 의기를 논의하고 장차 독립운동을 같이 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상진이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돌아오는 길에 경성에서 총포화약류단속령 위반으로 체포되면서, 대한광복회는 큰 타격을 입고 1년간 활동을 중지했다. 이에 황해도에 제2의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기로 마음 먹고, 1916년 대한독립군단을 황해도에서 조직했다. 대한독립군단은 대한광복회의 황해도, 평안도를 총괄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는 대한광복회 황해도 지부장을 명목상으로 맡았다.
이관구는 향후 10년을 국권회복운동의 준비기간으로 정하고,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양성, 민족의식의 고취, 빈민구제 등을 추진했다. 군자금 모집은 회원의 군자금 헌납, 자산가의 의연, 곡물무역상 경영을 통한 이윤추구 등을 통해 이뤄졌다. 황해도의 부자 오찬근은 대한독립군단의 회원으로 가입한 뒤 전후 3회에 걸쳐 150원을 제공하였다. 또한 옹진의 부호였던 이화숙은 해주 서촌 거부 6~7인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의 재정을 적극 지원했다. 한편 평안도 박천의 부호 양봉제는 평안남북도의 부호들과 함께 자금을 의연하였으며, 이관구에게 "재정은 내가 맡을 테니 그대는 충렬의사들을 다수 연락하다가 기회를 봐서 전국이 일시에 거의하게 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일제의 정보 기록에 따르면, 대한독립군단 회원들은 권총 및 기타 흉기를 들고 황해도의 여러 자산가를 협박하여 군자금을 징수했다고 한다. 1916년 음력 11월 황해도 해주군 장곡면에 거주하는 최봉직은 군자금을 의연하는 걸 거부하다가 권총을 맞아 상해를 입기도 했다. 한편, 이관구는 1916년 음력 9월 단둥현에서 5천원을 투자하여 '삼달양행'이라는 이름의 미곡무역상을 경영했다. 또한 1916년 음력 7월부터 10월경까지 무순에서 곡물상경영준비를 위해 체재 중 그곳에 사는 한인 학생 10여 명을 소집하여 강습회를 개최하였고, 1917년 음력 정원에는 장춘에서 자금 3천원을 투자하여 '상원양행'이라는 이름의 곡물무역상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조선 각지의 부자들을 모아 흥부회를 결성, 조직하여 남북만주에 상업기관, 학교, 회사, 병원들을 설립하고자 했다.
대한독립군단은 독립전쟁 준비에도 착수하여 중국, 러시아 등지에 학교를 설립, 민족의식을 고취해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황해도 일대의 뜻 있는 청년들을 만주 등지로 보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하였고, 나중에는 중국, 연해주 등 현지의 동포들을 중심으로 포섭했다. 또한 빈민 구제를 위해 1917년 음력 3월 간도에서 운영되는 빈민 병원 확장비로서 금 4천원을 투자하였고, 1917년 음력 9월 중국 청도에 병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는 중국에서 소작농으로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한인 동포들을 위해 병원을 세워 민심을 수습하고, 장차 독립전쟁을 벌일 때 이들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이관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 총독을 암살하고자 하였다. 그는 단둥현에서 1차 암살 계획을, 장춘에서 2차 암살 계획을 수립했지만 이뤄지지 않자 황해도 출신의 성낙규, 조선환, 박원동을 포섭하여 경성에서 3차 암살 계획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1917년까지 진행된 총독 암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1917년 음력 5우러경 황해도 해주군 화양면 변호리 주막에서 변동환 등과 모여서 대한독립군단에 가입시키고, 변동환을 황해도 총무로 삼아 본 운동을 전담하게 하였다. 이어 1917년 음력 11월 경성에 채류하던 중 광복회, 신한국장, 재무총장 등의 인장을 조각케 하고, 국권회복취지서를 제작했다.
그러나 1918년 6월18일 황해도 미율면 석정리에 거주하는 조하동이 해주경찰서장에게 대한독립군단에 대해 밀고하면서 이 모든 행적이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1918년 8월 18일 이관구, 성낙규, 조선환, 이태의, 오찬근 등 24명이 체포되면서, 대한독립군단은 해체되었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1월 23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강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 출옥 후 국내에 머물며 일제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으나 비밀리에 안창호 등과 연락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33년 다시 체포되어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고 전해지지만 #, 이를 입증하는 자료는 현존하지 않다.
이후 계롱산에 은거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수행하였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역사서를 저술했다.[2] 8.15 광복 후 서울에서 신정당을 조직하고, 의용군단을 편성해 신생 독립국가 건설을 추구했으나 미군정의 저지로 이루지 못했다. 1946년 사학연구협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한 뒤 <홍경래전>, <단기고사>, <만물언지>, <도통지전단> 등을 출간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북 옥구군으로 피난갔다가 1952년 3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관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참고 문헌
- 박환, <화사 이관구의 민족의식과 항일독립운동>, 숭실사학,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