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2 17:46:04

을밀


乙密 / Eulmil

1. 소개2. 실존 가능성3. 기타4. 관련 문서

1. 소개

조선상고사에 인용된 《해상잡록》 (海上雜錄)[1]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인물. 을밀 관련 사실은 아래 기록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아래의 기록은 춘향전의 모티브라고 추정되는 안장왕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안장왕이 주가 갇혀 있음을 몰래 탐지하여 알고 짝없이 초조하나 구할 길이 없어 여러 장수를 불러 “만일 개백현(皆伯縣)을 회복하여 한주를 구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과 만호후(萬戶候)의 상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왕에게 친누이동생이 있어 이름을 안학(安鶴)이라고 했는데 또한 절세의 미인이었다. 늘 장군 을밀(乙密)에게 시집가고자 하고 을밀도 또한 안학에게 장가들고자 하였으나 왕이 을밀의 문벌이 한미하다고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 을밀은 병을 일컬어 벼슬을 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 이에 이르러 왕이 한 말을 듣고는 왕에게 나아가 뵙고 “천금과 만호후의 상이 다 신의 소원이 아니라 ,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입니다 . 신이 안학을 사랑함이 대왕께서 한주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입니다 . 대왕께서 만일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 결혼케 하신다면 신이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구해오겠습니다 .”라고 하니 , 왕은 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마침내 한주를 사랑하는 생각을 대적하지 못하여 드디어 을밀의 청을 허락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였다 . 을밀이 수군(水軍) 5천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떠나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먼저 백제를 쳐서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살려낼 것이 니 대왕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쫓아오시면 수십 일 안에 한주를 만나실 겁니다 .”하고 비밀히 결사대 20 명을 뽑아 평복에 무기를 감추어가지고 앞서서 개백현으로 들여보냈다 . 태수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 생일에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오히려 한주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 사람을 보내 꾀었다 . “오늘은 내 생일 이다 . 오늘 너를 죽이기로 정하였으나 네가 마음을 돌리면 곧 너를 살 려줄 것이니 ,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한주가 대답하였다 . “태수가 내 뜻을 빼앗지 않으면 오늘이 태수의 생일이 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태수의 생일이 곧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요 , 내가 사는 날이면 곧 태수의 죽는 날이 될 것입니다 .” 태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빨리 처형하기를 명하였다 . 이때 을밀의 장사들이 무객(舞客)으로 가장하고 잔치에 들어가 칼을 빼어 많은 손님을 살상하고 고구려의 군사 10만이 입성하였다고 외치니 성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 이에 을밀이 군사를 몰아 성을 넘어 들어가서 감옥을 부수어 한주를 구해내고 , 부고(府庫)를 봉하여 안장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받으니 백제가 크게 동요하였다 . 이에 안장왕이 아무런 장애 없이 백제의 여러 고을을 지나 개백현에 이르러 한주를 만나고 , 안학을 을밀에게 시집보냈다
조선상고사》(출처:위키문헌)

2. 실존 가능성

북한에서는 '을밀대가 을밀에게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나, '을밀대'는 고려사 지리지 평양부조에 이미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 해석하면 오히려 을밀대에서 을밀이라는 인물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을 뿐, 그 역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없다.

3. 기타

부벽루는 장경문(長慶門) 밖, 전금문(轉錦門) 안, 영명사(永明寺)의 동쪽 켠에 있는데, 훌쩍 날 듯이 뛰어나 있고 강물이 담벼락을 때리며 암벽이 둘러싸고 치솟아 있다. 뒤에는 모란봉(牧丹峯)이 있고 앞에는 능라도(綾羅島)가 마주 보고 있다. 부벽루의 앞 기둥에는 ‘고요한 그림자는 벽옥을 가라 앉힌 것이요, 부동하는 광채는 금이 날뛰는 거라.[靜影沉璧 浮光躍金]’라는 대련(對聯)이 있다. 아름답고 깨끗한 점으로는 동방의 누대 중에서 으뜸간다. 동쪽으로 바라보면 조천석(朝天石)이 멀리 하늘과 같이 푸르고 서쪽에는 을밀대(乙密臺)가 소남문(小南門) 밖에 있는데 성가퀴가 둘러 있다. 그 가운데에 둥그런 봉분 형상이 있어 어떤 사람은 을밀(乙密)의 묘(墓)라고도 하는데, 읍 사람들이 그 의견에 따라서 산에 제사하는 곳으로 삼았다. 밤이 깊어지자 술에 취하여 득월루(得月樓)를 거쳐서 돌아왔다.
이해응의 계산기정(1803년)

조선 후기의 견문록인 계산기정에서 을밀의 묘가 언급된다. 소남문 밖에 동그런 봉분 형상이 있어서 생겨난 전승으로 추정된다.

4. 관련 문서


[1] 조선 중기에 쓰여진 야사집이다. 주로 삼국시대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신립 장군과 관련된 일화가 적혀있고 조선 숙종 시기인 18세기 초반(1720년 이후)에 승지 이문흥이 저술한 서곽잡록에도 인용된 것을 보아 17세기 초중반에 쓰여진 문헌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