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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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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靖難
을미정난
[1]
파일:goonbamking.jpg
사건전개 요약도
시기 1895년
장소 동삼성 일대
교전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선 파일:청나라 국기.svg 대청 정무군
지휘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전임 총리대신 최익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홍계훈
파일:청나라 국기.svg 북양대신 원세개
파일:청나라 국기.svg 북양군 장수 조곤
병력
약 30만명[2]
예비 동원 병력 약 30만명
약 3만명
피해
사망자: 17명
부상자: 32명
사상자 다수
결과
조선군의 우세 속 종전
원세개 실각 및 공화정부 수립
조청간 사대관계 청산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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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피아에서 연재되었던 대체역사물 고종, 군밤의 왕에서 일어난 사건.

2. 배경

1893년, 환국을 일으켜 서태후와 이홍장을 쳐내고 실권을 거머쥔 광서제는 손덕명이 이끄는 보국회와 원세개의 북양군을 친위세력으로 삼아 개혁에 착수했다. 그런데 한시라도 빨리 구폐를 일소하려는 광서제, 보국회의 조바심 때문에 개혁의 핵심 과제인 토지 분배가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진행됐고, 이에 강남 향신층과 몽골 왕공족 등 지주 계층이 거세게 반발하자 북양군이 총칼을 동원해 이들을 역도로 몰아 조리돌림을 하는 등 모든 불평과 비판을 강압적으로 틀어막았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권력의 무게추가 북양군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 상인들의 든든한 벗이 되어주던 지주들이 봉변하니 민심보다 더욱 민감한 전심(錢心)이 요동쳤고, 여기에 성급하게 식주공행(주식시장)을 폐쇄한 참의원의 미숙한 대응이 맞물려 조선에 황란(경제위기)이 들이닥쳤다.

1895년, 조정이 장차 천하 유란케 하는 화근이 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장지동의 남양군 병권을 회수하자 강남 민심이 더더욱 요동쳤다. 덕명은 임시방편으로 남양군을 토막내 강남 각 성에 속하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북양군은 사실상 청의 중앙군으로 거듭난 자신들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기 위하여 반대로 이번 기회에 강남의 반심 가진 자들을 모조리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옥균 내각은 당장은 황란 극복이 더 시급한 문제지만, 만약 북양군이 조선의 강남 이권을 침해할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리고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였다. 그런데 학사장교로서 군 복무 중이던 이척 참위, 즉 세자가 혹 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선봉을 맡겨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한양병공창에서 뽑아낸 조선제 기관총으로 내몽골 왕공들을 격파하여 한껏 기세가 오른 원세개는 조선 세자의 상소문은 전쟁을 싫어하는 조선왕의 블러핑에 불과하며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한들 상식적으로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북양군보다 많을 리 없고, 동삼성이 협조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조선이 물밑으로 경고장을 보냈음에도 풍국장에게 한양병공창을 비롯한 여러 기기창의 운영권을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동삼성을 쥐고 있는 총독 공친왕은 조선이 대놓고 도의를 어기지 않는 이상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하여 조선군의 만주 통행을 사실상 용인하였다. 이에 북양군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변법이 늦춰지면 존재의의가 사라진 자신의 권세가 사라질 수 있다고 여긴 원세개는 오히려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자금성에 유폐시키고 계엄을 선포하였다. 그런 북경의 영에 응답하듯, 조선은 결국 동원령을 선포하여 군대를 소집하고 정축년 북벌 이후 다시 압록강을 넘었다.

3. 전개

당초 원세개는 조선이 약 3만명 정도의 병력만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고, 설령 10만가량의 병력을 동원하더라도 동삼성의 철도파괴공작에 막혀 산해관을 뚫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정찰병의 보고도 조선군의 병력은 3만이라는 내용이었기에 안심했다. 그러나 며칠 뒤, 이들의 예상을 뒤엎는 사실이 알려진다. 각각의 보고에서 확인된 조선군은 같은 부대가 아닌 제각각 다른 부대였던 것이다. 조선은 동원령을 내려 60만 대군을 동원하고 그중 30만이 압록강을 넘어 왔으며 그 선두에는 황제에게 지부상소를 하러 간다는 명분으로 최익현, 황현을 비롯한 도끼로 무장한 유생 여럿이 있었다. 당시 요양을 방어하고 있었던 조곤은 당초 보고받은 것보다 10배나 되는 조선군이 들이닥치자 엄청 당황했으며 여기에 최익현의 호통으로 이렇다할 전투도 벌이지 못한채 철도만 파괴하고 북경으로 도망치듯 귀환했고 조선군은 빈 성을 열고 순조롭게 산해관으로 향한다.

게다가 원세개가 계엄을 선포하고 광서제를 유폐시키는 것을 본 동삼성은 이를 조선과 청의 전쟁이 아닌 조선과 북양군간의 사사로운 싸움이라 보고 중립을 선언하지만, 조선군이 영토를 경유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상인들이 조선군에게 양곡을 팔아도 방관하는 등 사실상 조선의 편을 들고 장작림 등 일부 동삼성 주민은 이른바 보로의군을 결성해 북양군의 철도 파괴공작을 방해하며 조선을 돕기까지 한다.

이후 통주에서 원세개와 최익현의 담판이 벌어졌지만 결렬되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없다고 직감한 최익현은 이후의 일을 홍계훈에게 맡긴다. 홍계훈은 훈련을 가장해 신식 화포를 쏘며 무력시위를 벌이나 다음날, 북양군의 기습으로 산해관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진다. 다행히 조선군은 사전에 기습에 대한 대비를 해두었기에 50여 명만이 사상당해 산해관에 집결한 30만의 군세에 비하면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선방군의 선전으로 우세를 점한다.

이후 북양군은 조선쪽에서 먼저 화포를 쏘며 위협하니 우리도 이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며 물러날 것을 고한다. 이에 분개한 조선군은 밤사이 참호를 파고 기관총을 설치해 다음 날부터 전면적인 교전 준비에 들어간다. 이를 들은 원세개는 주둔군을 참호선 앞으로 돌격시켜 막대한 손실을 내고 전투를 끌면서 조선군의 명분을 박살내려고 했으나 때맞춰 북양삼걸을 휘어잡고 민회를 다시 소집한 후 북경을 탈출한 광서제가 북양삼걸을 대동해 직접 산해관에 당도하고, 그 자리에서 원세개를 파면한다.

4. 결과

광서제는 지금의 사태가 천조를 유지하려는 조바심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 판단하고는 황실의 모든 권력을 공화정부에 이양한다는 약조와 더불어 조선을 청의 번국이 아닌 동등한 나라로 칭하면서 수천년간 유지되었던 한반도와 중국 간 천조질서의 막을 내렸다. 이후 광서제의 측근인 덕명은 미국의 사례를 본떠 분구필합이면 합구필분(分久必合 合久必分)이라지만 나눠질 때도 합쳐질 때도 백성의 피해가 크니 차라리 금간 채로 묶어놓자며 연방제를 도입하게 된다.

이번 사건의 원흉인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쫓겨난채 종적을 감추고 북양군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남은 세력은 이홍장의 대대적인 물갈이로 인해 대다수의 인원이 교체되었다. 한편 자칭 북양삼걸은 계엄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해서 찾아온 이홍장에게 얻어터졌다.

조선은 북벌이라 부르기엔 애매하지만 북벌 아닌 북벌을 통해 피를 거의 들이지 않고 병자호란 이후 250여 년 만에 청의 황제로부터 동등한 국가로 대우받으며 북벌의 명분이 된 삼전도의 굴욕을 늦게나마 설욕할 수 있었으며, 강남 공업지대의 이권을 재확인받음과 동시에 출병에 든 비용과 더불어 사망한 군인들의 유가족에게 지급될 정도의 미미한 배상금만을 받았다. 이후 조청이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되면서 구 사대질서의 상징이었던 영은문과 삼전도비는 원래 위치에서 모화관으로 옮겨져 후대를 위한 참고자료로 쓰이게 되었다. 한편 조선이 총 병력 60만을 동원하고 이중 절반을 출병시켰다는 소식은 전 세계에 전해져 이전에 프랑스를 격퇴한 후 알음알음 전해진 조선의 강함이 프랑스의 허언이 아닌 진정한 극동의 강국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사실상 북양군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산해관에 30만, 북경에 일만오천 병력을 진주시키고도 특별한 이권침탈 없이 물러간 것을 계기로 하여 조청 양국 간의 신뢰가 크게 높아져, 이후로도 조청 양국간 우호관계가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1] 작중 정식명칭은 나오지 않았지만 당시 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정난'이란 용어를 사용함에따라 이와 같이 서술. [2] 산해관 교전 참전 병력 15만, 후속 병력 15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