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동정 | ||
시기 | 서기 1595년 5월 ~ 1595년 8월 | |
장소 | 일본 | |
원인 | 조선의 경인왜란에 대한 보복원정 | |
교전국 | 조선 | 일본 |
지휘관 |
조선국왕 이윤[1] 도원수 이순신 부원수 권율 이억기 황진 김시민 김응서 김충선 곽재우 사노부 |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 우키타 히데이에[2] 코바야카와 타카카게[3] 마에다 토시이에[4] 모리 데루모토[5] 이시다 미츠나리[6]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구키 요시타카[7] ← 다카하시 나오츠구[8] ← 나베시마 나오시게[9] ← 시마즈 이에히사[10] ← 쵸소카베 모토치카[11] ← 호소카와 타다오키[12] ← 구로다 요시타카[13] ← 도쿠가와 이에야스[14] ← 우에스기 카게카츠[15] ← 다테 마사무네[16] ← 사타케 요시시게[17] |
병력 | 약 300,000명 | 약 300,000명 |
피해 | 사상자: 20,000명 | 사상자: 150,000명 |
결과 | 일본의 패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포획. | |
영향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새로운 천하인 등극 대마도와 일기도의 완전한 할양. 북구주의 일대의 통치권한 이양. 아모국의 완전한 독립 조선의 패권화의 시작 |
1. 개요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2부에서 일어난 사건이자 경인왜란과 함께 2부의 메인 이벤트. 작중 조선 역사에서 중대한 변곡점이 되는 사건으로 제후국 조선이 열강 대한으로 발돋움하게 된 기틀이 된 사건이다.2. 진행
2.1. 조선의 보복원정 준비
조선은 경인왜란에 대한 보복으로 원정을 준비한다. 원정의 목표는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오사카(정확히는 오사카 성) 공략. 동원되는 군사수는 전투병 16만에 비전투병 포함하여 총 30만이라는 유례없는 대군. 원정준비는 명에서 오는 군자금 지원과 연속해서 5년간 풍년이 들어 곡식이 차곡차곡 쌓여 군비 준비에도 문제가 없어지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보복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은 일본에 갈래선을 이용한 통상파괴작전을 실행하여 일본을 괴롭혔고[18] 동시에 도쿠가와 가문을 포함한 몇몇 다이묘들과 협약을 맺어 전쟁을 유리하게 끌어나가기 위한 밑준비를 차곡 차곡 진행하였다. 또한 2차 견서사가 복귀하면서 윙드 후사르를 데려와 그것을 군에 통용시켜 전력을 더욱 강화하였다.2.2. 보복원정
보복원정의 시작과 함께 이순신은 도원수이자 명나라 정1품 수군도독으로 임명되어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1단계로 대마도와 일기도를 상륙하여 사흘만에 섬을 탈환[19]한다. 2단계로 규슈 점령을 위해 하카타에 상륙, 규슈 일대의 도요토미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의 협조를 받아 한 달만에 규슈를 평정한다.
육군이 후방 역할을 맡을 규슈를 평정하고 최종 목표인 오사카 진공을 위해 분고에 집결하는 동안 수군은 오사카로 향하는 진공로인 세토내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이순신이 직접 지휘하는 본대는 세토내해의 입구인 간몬 해협을 돌파하여 일본 수군에게 연달아 승리를 거두고 오사카 코앞의 아와지시마까지 진격한다. 동시에 정발이 지휘하는 남만선 함대는 일본 남쪽의 외해로 돌아 외해로 도망친 일본 수군을 섬멸하고 시코쿠와 아와지시마 사이에 위치한 나루토 해협을 돌파하여 오사카만 서쪽의 모든 제해권이 조선군에게 넘어간다. 한편 시코쿠에는 시마즈 군이 파견되어 토사의 초소카베 가문을 포섭한 후 시코쿠의 도요토미군을 공격하고, 주고쿠의 모리 영지에는 여진족 기병 1만을 파견되어 대대적인 약탈을 벌인다. 또한 시코쿠 북부의 사누키국에선 지역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기존 영주 가문인 소고씨를 몰살한 이코마씨를 쫓아내고 조선군에 항복했다. 한편 이에야스를 비롯해 이미 조선과 접촉 중이던 동국의 다이묘들은 빨리 지원군을 보내라는 히데요시의 닥달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시간을 끌며 도요토미군이 조선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걸 방관한다.
개전 3달 만에 세토내해 평정까지 완료되자 분고에 집결해있던 조선군이 아와지시마로 이동, 오사카에 상륙하여 결전을 벌일 준비를 시작하고 히데요시는 구로다 요시타카를 조선군에 보내 마지막 협상을 시도하나 도리어 요시타카가 조선에게 포섭되어 히데요시를 배신한다. 도요토미군은 조선군의 오사카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마지막 승부수로 600여 척의 수군 함대를 동원,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오사카만에서 결전을 벌이지만 일본 수군 총대장이었던 구키 요시타카가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전장을 이탈하여 도주해버렸고, 안 그래도 화력에서 열세였던 일본 수군은 지휘관의 이탈로 와해되어 이순신에게 패배한다.
마지막 도박이었던 오사카만 결전에서도 패한 후 요사타카는 히데요시를 아즈치 성으로 보내고 자신은 오사카 방어를 핑계로 오사카에 남아 조선군에게 오사카를 넘긴다. 오사카에 무혈입성한 조선군은 결전을 위해 히데요시가 도망친 아즈치 성으로 진격을 시작한다. 히데요시는 마지막 명분으로 고요제이 천황을 자신과 함께 데리고 아즈치 성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이미 히데요시를 배신한 호소카와 부자가 고요제이 천황을 데리고 교토를 빠져나온 상태였고, 고요제이 천황은 히데요시를 조적으로 선포하는 조서를 반포해 도리어 조선군에게 힘을 실어준다. 그리고 히데요시와 조선군 중 누가 이기는지 일단 관망할 생각이던 동군(이에야스, 다테, 우에스기, 사타케 등)은 천황의 조서를 받자마자 바로 히데요시를 배신하고 조선군 편에 선다.
2.3. 비와호 전투
연패 끝에 오사카까지 내주고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20] 도요토미군과 히데요시를 끝장내기 위해 아즈치 성까지 진격해온 조선군이 아즈치 성이 바라다 보이는 비와호 옆 평원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인다. 조선군의 화력(18근포, 12근포, 무종야포(자주포), 대신기전, 중신기전, 조총 일제 사격)과 오도리군, 비호군 등의 기병, 히데요시를 배신하고 후방에서 도요토미군을 습격한 동군에 의해 도요토미군은 완전히 궤멸당한다. 히데요시는 카가로 도망쳐 재기를 기도했으나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낚여 미리 매복해있던 임꺽정과 서림에 의해 붙잡힌다. 이로서 4월 2일에 시작된 을미동정은 7월 23일에 종결되어 111일만에 조선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한편 비와호 전투 이후에도 도주한 구키 함대가 조선 수군에 추격당해 격멸당하고 주고쿠에선 모리군과 조선군 및 야인들 간 교전이 계속 진행되는 등 전투가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3. 결과
이 전쟁으로 일본은 대마도와 일기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며 두 섬은 조선의 경상도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또한 규슈 북부의 히젠, 치쿠젠, 부젠에 대한 통치권을 조선에 영구적으로 위임하고, 규슈 중부의 치쿠고, 분고, 히고는 친조선파 영주인 타치바나, 사나다, 아소씨(실질적으론 호소카와, 나베시마, 구로다 및 조선에 협력한 일본 장수들에게 분배)에게 분배되었으며 시마즈가 휴가를 완전히 병합하며 규슈는 사실상 조선에 의해 장악되었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이대장군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나, 명나라에서 파견한 양호가 평화협상에 개입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진서대장군이자 일본국왕으로 등극해 명목상 규슈의 지배자인 동시에 이에야스보다 상위에 서는 이변이 벌어졌다. 이후 조선이 요시아키에게 아소 고레미츠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만들도록 압박하여 진서대장군직은 아소씨에게로 이어진다.
또한 일본은 류큐, 아모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수군 또한 도쿠가와 막부를 제외하곤 보유할 수 없게 되면서 대외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다만 도쿠가와 막부는 규슈에 대한 통제권을 잃기는 했지만, 조선군에 의해 기존 세력이 박살난 주고쿠, 간사이를 완전히 장악하며 나름 권력을 공고히 다질 수 있었고, 이후로 지속적으로 도자마 다이묘들에 대한 견제와 숙청을 하며 나중에는 원 역사 이상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추후 대한(조선이 칭제건원)에 경신대기근이 닥친 틈을 타 도쿠가와 막부가 진서대장군부를 압박해 진서대장군직을 반납하게 만들어 대한의 직할령인 북규슈를 제외한 규슈를 다시 장악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 당시 대한은 진서대장군부를 지키기 위해 일본과 사생결단을 내기보다는 도쿠가와 막부를 새 파트너로 삼는 것을 선택하였고 덕분에 일본을 향한 대한의 압박은 줄어들며 막부는 지위를 공고히 다지고 대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나마 해외 진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 코바야카와 다카카게, 가토 기요마사 3인은 최고 전범으로 지목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갈증과 더위로 말려 죽이는 방식의 책형을 당하였다.[21][22]
4. 기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애피소드이자 전쟁이었다. 현실의 임진왜란에서나, 본작의 경인왜란에서나 조선 쪽에서는 일본군에 붙잡혀 협박당한 경우를 제외하면 적에게 부역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을미동정에서 일본 쪽은 조선군 측에 붙은 다이묘들과 히데요시에게 비협조했던 다이묘들을 모두 합치면 사실상 일본의 절반이 지배자인 히데요시에게 등을 돌렸다. 물론 이는 명분이 조선 측에 있는 전쟁이었고, 지배자인 히데요시가 비정상적인 경로로 집권한 상황이라 불만세력이 많았고, 조선에서도 단독으로 일본 전체를 굴종시키기는 어렵다는 판단 하에 적극적으로 일본의 다이묘들을 포섭하려는 밑작업을 벌였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1]
원정에 친정하지는 않음.
[2]
오대로 중 1인이자 규슈 방어 책임자. 원역사랑 달리 히데요시의 명으로 전봉되어 히젠의 영주가 되었다.
[3]
오대로 중 1인이자 규슈 방어 책임자.
[4]
오대로 중 1인.
[5]
오대로 중 1인. 조선과 히데요시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지만 유유부단해서 끝까지 이도저도 아닌 태도를 취하다 조선에게 적으로 간주당했다.
[6]
오봉행 중 1인.
[7]
수군 총대장. 오사카만 해전에서 탈주. 허나 조선 측도 구키를 적으로 인식해 기어이 추격해서 함대를 전멸시켰고 본인은 체포를 피해 잠적하였다.
[8]
친형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조선군으로 전향해 생존했다는 것을 알고 배신.
[9]
조선군에 빠르게 항복.
[10]
규슈 남부 전역을 댓가로 조선군에 협조.
[11]
시코쿠 전역을 댓가로 조선군에 협조.
[12]
아내
가라샤가 히데요시에게 강간당하고 자살한 원한으로 인해 아버지
후지타카와 함께 배신.
고요제이 덴노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신변을 확보한 후 히데요시의 지위를 박탈하는 칙서를 받아내었다.
[13]
협상 사절로 나갔으나 조선 측에 타협의 의지가 없음을 알고 생존을 위해 배신. 히데요시를 속여 후퇴하게 한 후 오사카를 무혈개성했다. 이후 아들
나가마사에게 밀사를 보내 히데요시를 잡아서 조선에 넘기게 하였다.
[14]
오대로 중 1인이자 동군 총대장. 조선이 보낸 노부나가의 진짜 유언과 천황의 칙서를 명분으로 동군 전체와 함께 히데요시를 배신.
[15]
동군 소속. 이미 조선과 물밑에서 협력 중이었다.
[16]
동군 소속. 이미 조선과 물밑에서 협력 중이었다.
[17]
동군 소속
[18]
세토내해 내부를 제외하고는 북으로는 에치젠국(현
후쿠이현), 남으로는 이세국(현
미에현) 이서의 모든 지역을 공격했다.
[19]
일기도는 섬 대부분이 평지인 데다가, 영주가 하필이면
원균이었던 것도 모자라 원래 영주인 소 요시토시가 귀환해서 백성들이 우르르 항복한 바람에 하루만에 탈환했다. 대마도는 탈환은 하루만에 했지만 잔존병들이 산 속에 남아서 지속적인 토벌이 진행되는데, 대마도 출신 왜병들이 토벌을 맡아 순조롭게 토벌되었다.
[20]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집권한 히데요시에겐 천하인으로서의 권위가 무너지지 않고 후퇴할 수 있는 최후의 선이 노부나가의 거성이었던 아즈치 성까지였다.
[21]
기요마사는 3부 때 유해가 다른 왜장들과 함께 반환되기는 하였으나, 히데요시와 다카카게는 유해를 인도받을 직계자손도 없는데다 워낙 극악한 죄인이라며 일본 측에서도 유해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22]
적국의 군주를 잡아가 이런 혹형에 처한 것은 경인왜란 직후 임해군에게
능지형을 집행한 것과 함께 한국이 적에게 무자비하단 이미지를 씌워 3부 계미남변 때 마닐라 총독이 항복을 거부한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