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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와히드 조의 칼리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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أبو يعقوب يوسف
아부 야쿠브 유수프[1]
생몰연도: 1135년 ~ 1184년
재위: 1163년 ~ 1184년
1. 개요
무와히드 왕조의 제2대 칼리파. 부왕을 대신하여 안달루스의 총독을 맡았고 즉위 후에도 세비야에 알카자르를 짓는 등 자주 머물렀다. 그는 이븐 루시드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으나 이슬람의 자히리 학파를 제외한 서적들을 금서로 지정하는 등 사상 탄압을 행하였다. 1184년 포르투갈을 공격하여 산타렘을 포위하던 중 얻은 부상으로 사망하였다. 아들 야쿠브가 계승하였다.2. 생애
1158년 아폰수가 알카세르를 점령하였다.1162년 그라나다 인근 승리하였다.
1164년, 알폰소 2세가 아라곤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1165년 가을, 무와히드 군대는 무르시아 토후국을 침공하여 로르카를 향해 진군하였다. 이에 이븐 마르다니쉬가 출정하였지만 과달레테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1166년, 알폰소 2세가 프로방스를 정벌하였다.
1167년, 알칸타라 기사단이 창설되었고, 1176년에 기사단을 교황이 승인하였다.
1165년~1168년 '포르투갈의 엘 시드' 기랄두가 이보라, 트루히요, 카세레스, 알렝테주 등 점령하였다.
1169년 5월, 기랄두가 바다호스 점령하였다. 시타델 항거. 아폰수에 도움 요청, 원군과 합류. 레온의 페르난도 2세가 공격, 아폰수가 낙마해 부상을 입었다. 무와히드 군대에 잡혔다. 그 영향으로 아폰수가 말을 못타게 되었다. 무와히드 왕조에게 트루히요, 카세레스 등 토해내고 풀려남. 페르난도, 복속 대가로 바다호스 무슬림들에게 돌려줌. 바다호스, 페르난도가 떠나자 무와히드 측에 항복. 이에 기랄두가 재차 공격, 실패 후 무와히드 측에 투항한다.
1170년, 카세레스에서 산티아고 기사단이 설립되자, 1175년에 교황은 이를 승인하였다.
1172년, 이븐 마르다니쉬가 사망할때, 아들에게 기독교 세력에게 항복할 것을 유언하였고. 그 아들을 실행에 옮겨 항복하자, 무와히드 왕조는 톨레도 진격 위해 우에테 포위하였다.
1173년, 탈라베라 일대를 약탈하였다.
1174년, 기랄두가 아폰수와의 결탁 의혹에 처형되자, 무와히드 왕조는 레온 왕국을 공격하였고, 알칸타라를 점령하였으나,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였다. 한편 교황은 무와히드 왕조에 대항하는 세력에게 사면하고, 돕는 세력을 파면하는 명령을 내렸다.
1176년, 헨리 2세의 중재 하에 나바라-카스티야 국경 분쟁이 일시적 종결되자, 산초 6세, 알폰소 8세가 빼앗긴 땅을 반환을 요구하자, 유수프 1세가 딸의 석방하는 조건으로 조공을 할것을 요구하였다. 이후 마디야와 자윌라에 상관 및 창고 설치 허용하고, 아이유브 왕조에 대한 공동 대응 나선다.
1177년, 페르난도 2세가 과달키비르 건너 헤레즈까지 공격하였다. 포르투갈이 무와히드 왕조가 지배하는 세비야를 공격하여 강에 정박해있던 선박들이 파괴되었다. 알폰소 8세가 알폰소 2세와 함께 쿠엔카 공격하였고, 9월 14일에 항복하였다. 톨레도 동부 지역을 차지하려는 아라곤의 야욕을 자극하였다. 그 도움 대가로 알폰소 2세에게 사라고사에서 봉신의 의무를 풀어준다.
1179년 3월 20일, 카졸라 조약. 점령지 소유에 있어 아라곤-카스티야 동등 권리. 산초 6세 대해 동맹. 히스파니아 분할. 발렌시아 ~ 알리칸테 아라곤에게. 무르시아 잃고 동등 왕국 지위 얻음. 5월 23일에 포르투갈 왕국을 인정한다.
1180년 시칠리아 왕국 해군이 안달루스로 향하던 무와히드 함선을 나포했는데, 포로 중에는 유수프의 딸이 있었다.
1184년 봄, 유수프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을 한다. 세비야, 바다호스를 거쳐 산타렘 포위를 하지만, 후퇴 중에 포르투갈 군대가 습격을 하였다. 유수프 1세가 중상을 입었고, 세비야를 도달 한 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