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12:08:14

유개(후한)


후한의 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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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愷
유개
파일:유개.jpg
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劉)
(愷)
백예(伯豫)
생몰 기간 ?년 ~ 124년 7월 24일
고향 예주(豫州) 패국(沛國) 풍현(豊縣) 
재임기간 태위 재임기간 112년 4월 7일 ~ 115년 12월 29일
사도 재임기간 115년 12월 29일 ~ 120년 12월 16일
태위 재임기간 121년 8월 16일 ~ 123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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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조부 중종 효선황제 유순(中宗 孝宣皇帝 劉詢)
고조부 초효왕 유오(楚孝王 劉囂)
증조부 초사왕 유연(楚思王 劉衍)
조부 초왕 유우(楚王 劉紆)
아버지 거소후 유반(居巢侯 劉般)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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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명신이며 자는 백예(伯豫)로 예주 패국 풍현 출신. 현조 선제로 한나라의 종실이다.

2. 생애

유개는 아버지인 유반의 작위를 동생인 유헌(劉憲)에게 물려주기 위해 집을 뛰쳐나가 은둔하였다.

장화 연간(章和, 87년 ~ 88년) 위에 사실이 들통나 봉국을 폐지해야 한다는 요청이 일자 한장제는 의로운 행동이라며 칭찬을 하였고 결국 봉국 폐지는 무마되었다. 그러나 유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98년 또 다시 봉국 폐지로 소란스러워지자 시중(侍中) 가규(賈逵)는 한화제에게 상주하길
"공자가 말하기를 '예양(禮讓)의 도리로 나라를 물려줄수 있는데 정치를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거소후(居巢侯) 유반의 아들 유개는 행실이 바르고 청렴하며 형제와의 우애가 돈독하여 유현에게 물려주기 위해 일부러 은둔한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관리들은 선을 위한 행동임을 몰라 보고서 법에만 매달려 이런 바른 풍조를 장려하지 않고 관용과 인후의 교화도 못하였습니다. 전대에는 부양후(扶陽侯) 위현성(韋玄成)이 있고, 근대에는 능양후(陵陽侯) 정홍(丁鴻)이 있었는데 모두 본래 이어야할 작위를 받지 않았음에도 좌천당하지 않고 오히려 재상에 올랐습니다. 지금은 백이(伯夷)의 절개를 가진 유개를 관대하게 대하여 조정의 인덕을 널리 나타내야 합니다."

화제는 이 말을 옳다고 여겨 조서를 내려 "유개의 뜻을 높이사 유헌이 작위를 잇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은 특별한 상황에 대한 미봉책이니 앞으로는 이것을 예로 삼을 수 없다."라고 하고 98년 유개를 찾아내 낭(郎)으로 이명하고 곧 시중(侍中)으로 임명하였다.

유개가 입조(入朝)하자 동시기에 관리가 된 자들은 모두 유개의 품행의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107년 태상(太常)이 되고 112년 4월 7일에는 사공(司空), 115년 12월 29일에는 사도가 되었다.

원래 후한에는 삼공구경을 포함해 녹봉이 2천 석 이상인 관리와 각지의 자사(刺史)들은 부모가 죽어도 3년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 많은 신하들이 상례를 하지않았다. 등태후는 조서를 내려 장리 이하의 관리들까지 3년상을 해야하도록 명하였지만, 공경대신들은 토론을 거쳐 각 군(郡)의 관리들은 이것을 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유개만이 말하길
"장리 이하의 관리들을 삼년상을 하도록 명한 것은 교화를 숭상하고 풍속을 바꾸어 효를 고취하기 위한 목적에 불과합니다. 지금 자사들은 이천석의 녹봉을 받고서 각 주군(州郡)의 모범으로써 백성을 교화하고 효를 장려하기에 자사(刺史)들은 도리에 따라 삼년상을 지내는 예로써 자가자신으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공경대신들은 그 자초지종을 살피지 않고서 관리들이 상복을 입어서는 안된다고 하니 이것은 강물의 근원을 흐리게 하고서 맑은 물을 얻을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모양을 구부리면서도 곧은 모양의 그림자를 얻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등태후는 유개의 말을 옳다고 여겼다.

정서교위(征西校尉) 임상(任尙)이 불법으로 이익을 취한 혐의로 구속되어서 추궁받자 등즐(鄧騭)의 보좌인격이었던 임상은 등즐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태위(太尉) 마영(馬英)과 사공(司空) 이합(李郃)은 등즐의 압력으로 인해 임상을 보고하지 않고서 몰래 풀어주었다. 그러나 유개는 동조하지 않았다. 이후 상서(尙書)에서 재수사를 하자 위에 사실이 들통나 마영과 이합은 문책을 받아야만 했다.

120년 12월 16일 병을 이유로 낙향하였다.

121년 8월 16일 죽은 마영을 대신하여 태위가 되었다.

123년 10월 6일 다시한번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니 안제는 하남윤(河南尹)에 상응하는 녹봉을 내렸다.

124년 사망하였다. 한안제는 그를 위해 오십만전(錢)과 비단 천필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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