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이며 자는 휴명(休明)으로 위표(韋彪)의 아들.
옹주 경조군 두릉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경학과 바른 행실로 유명했으며, 후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주군의 부름이나 양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며, 양기가 죽고 여러 인재들을 등용하면서 159년에 진번이 서치, 강굉, 원굉, 이담 등과 함께 천거해 황제가 공거로 불렀다.
위저는 패릉까지 갔다가 병을 핑계로 거부하고 운양산에 숨어 약초를 캐고 돌아오지 않았으며, 담당 관리가 벌을 줘야 한다고 상주했지만 환제는 특별히 용서하고 하남윤에게 조서를 내려 예를 갖춰 초빙하게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168년에 영제가 즉위해 두무, 진번 등을 주살하고 조절이 자신에 대한 비방을 수습하기 위해서 현명한 인재들을 중용하려 하면서 황제가 위저의 집을 방문해 동해국의 상으로 초빙해야 한다고 상주했으며, 위저는 조서를 보고 평민의 관을 벗고 동해국에 부임했다.
위저의 정사는 위엄과 형벌로 일괄했고 타 군에서 벌을 받은 자의 처벌을 또 상주했다는 죄에 걸려 좌교에 보내져 노역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후처가 교만 방자하게 정사를 어지럽혀 명성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고향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은자들은 위저를 수치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