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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豫西鄂北會戰(위시-어베이 전투)
일본어: 老河口作戦(랴오허커우 작전)
영어: Battle of West Henan–North Hubei(후난 서부-어베이 북부 전투)
위시-어베이 전투 | ||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일전쟁의 일부 | ||
▲ 위시-어베이 전역도 ▲ 지휘관의 훈시를 듣고 있는 국민혁명군 병사들 ▲ 이동 중인 일본군 |
||
날짜 | ||
1945년 3월 21일 ~ 1945년 5월 11일 | ||
장소 | ||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후베이성 북부 | ||
교전국 |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 일본 제국 |
지휘관 |
파일:대만 국기.png
류치 파일:대만 국기.png 왕쑤밍 |
사사키 신노스케 |
결과 | ||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의 승리 | ||
영향 | ||
일본군의 대중국 공세 역량 상실 | ||
병력 |
파일:대만 국기.png
1,5 전구 - 제22집단군 - 제 41, 59, 69, 77군 |
4개 사단, 2개 여단 |
피해규모 | 파일:대만 국기.png 43,000명 사상 | 16,000명 사상 |
1. 개요
중일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말부터 5월 11일까지 벌어진 전투. 샹시 전투와 같은 시기에 진행된 일본군 최후의 대중국 공세였지만 국민혁명군의 반격으로 끝내 실패했다.2. 배경
1945년 초, 일본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개시한 이래 8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100만에 가까운 대군을 투입했으나 중화민국을 굴복시키지 못한 채 막대한 전쟁비용을 낭비했다. 또한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단행한 후 태평양 전쟁을 개시했으나 전황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급기야 1945년 3월 이오지마 전투에서 패해 미군이 일본 본토에 지속적인 폭격을 가하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말았다. 또한 믿었던 동맹국 나치 독일은 독소전쟁에서 참패를 거듭하고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프랑스 전선에서도 밀려 독일 본토까지 공략당해 패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는 이무리 낙관적인 일본인이라 해도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다.그러나 일본 군부는 이 어려운 시국에서도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다른 전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위인 중국 전선에 희망을 걸었다. 대본영은 미군이 중국 전선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중국을 하루빨리 제압한 후 중국에 파견된 100만에 가까운 대군을 타 전선에 파견한다면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한 일본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은 중국 공군이 핑한 철도의 남쪽 구역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 거슬렸다.
이에 1945년 1월 22일, 지나 파견군의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는 랴오허커우와 즈장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랴오허커우 공격에는 북지나 방면군 소속 4개 사단과 2개 여단이 동원될 예정이었고, 즈장 공략에는 중지나 방면군 소속 제20군 2개 사단(116사단, 47사단)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오카무라 대장은 이 두 방면에서 공세를 한꺼번에 벌인다면 국민혁명군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으며 적의 저항을 보다 쉽게 분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1945년 3월 21일, 북지나방면군이 먼저 랴오허커우 공세를 개시하고 중지나 방면군은 4월 9일에 뒤따라 즈장 공세를 개시한다.
3. 전력
3.1. 일본군
- 제12군: 지휘관 우치야마 히데타로 중장(4월 7일까지), 타카모리 타카시 중장
- 제 34군 1부: 제 39사단
- 제1군 1부: 독립 보병 제14여단
- 제 110사단
- 제 115사단
- 전차 제3사단: 예하 3개 전차 연대, 기동보병 제3연대(1개 대대 결원), 기동포병 제3연대(1개 대대 결원), 2개 전차대대(한 대대 당 중전차 20량). 총 장갑전투차량 100여량.
- 기병 제 4여단
- 요시타케 지대: 제117사단 보병 제87여단(요시타케 히데토 소장 지휘)
3.2. 국민혁명군
- 제 1전구: 사령관 후쭝난. 일본군의 후방 및 측면을 습격하며 일본군의 전력을 소모시키다가 제5전구와 연합해 일본군을 포위섬멸하는 임무 수행.
- 제 5전구: 사령관 류치. 일본군의 공세를 지연시키며 천천히 후퇴해 전력을 보전하며 반격의 시기를 기다리는 역할을 맡음.
4. 경과
4.1. 어베이 방면 전투
1945년 3월 21일, 일본군 제 5사단, 39사단 주력과 독립 제5,12 여단이 국민혁명군 제5전구를 침입해 동목령-염지묘 전선에서 5전구 소속 제 59군 1개 부대와 맞붙었다. 3월 23일, 일본군 선두부대가 쭝시엔을 함락해 기세를 올렸지만 24일에 국민혁명군 제 59군과 제 69군의 주력부대가 바두하 강에서 일본군을 저지했고, 일본군은 무리한 돌파를 시도하다가 많은 사상자를 초래했다. 26일, 일본군 4천여 명의 증원부대가 현장에 도착해 그날 밤까지 격전을 벌였다. 3월 28일 일본군이 난춘을 점령했지만 국민혁명군 제 77군이 즉시 반격하여 다음날 난춘을 탈환했다.한편, 일본군 제1군 1부는 구가묘(歐家廟)에서 주력군과 함께 양양, 번성을 향해 돌진하여 수비군 제 69군 부대를 번성 동북쪽과 서남쪽 방면에서 포위했다. 4월 2일, 일본군 제77 사단과 제59사단 1부가 각각 전투에 참가하여 4일 저녁에 난장현을 공격했다. 4월 5일 아침, 2천여 명이 넘는 일본군은 타이홍산을 공격했고 수비군 2개 사단이 이에 맞서 싸웠다. 4월 10일 저녁, 일본군은 국민혁명군의 결사 항전에 고전한 끝에 난장현을 포기하고 징먼 동쪽으로 후퇴했다. 이때 푸양 근처에 있던 4천명 이상의 일본군이 웨이허강을 따라 서쪽으로 진군했고 수비군 69사단이 츠하시를 버리고 떠난 후 곡성(穀城) 앞까지 행진했다.
4월 12일 국민혁명군 제22집단군은 츠하시를 장악한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곡성 남쪽에 도착했던 2천 명이 넘는 일본군은 국민혁명군에게 격파되었다. 5전구는 추격을 명령했고, 41군은 59군, 77군 6군 각 부와 혐력하여 일본군이 점령했던 영토를 회수했다. 4월 18일, 국민혁명군은 번성을 탈환헀다. 이 시점에서 웨어허강 서쪽은 전투 전 상황으로 돌아갔다.
4.2. 라오허커우 공방전
한편, 일본군 제110사단, 115사단, 독립 제11사단, 기병 제4여단, 전차 제3사단은 3월 21일에 제8사단, 제68사단, 제55사단으로 결성되어 랴오허커우 공세를 개시했다. 3월 24일, 수비군은 이청점-상하관 전선을 포기하고 남양으로 후퇴했다. 25일, 일본군은 재차 남양을 공격했고 26일 일본군 기병 제4여단은 랴오허커우로 진군하여 관화 부근에 진입해 27일 랴오허커우 부근에서 국민혁명군 제45군 1개 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의 다른 부대는 전핑현, 네이샹현, 시샤커우 방면을 공격했지만 수비군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혔다.3월 28일, 6천여 명의 일본군이 덩현, 문곡집(文曲集) 일대를 공격했고 5전구 소속 1개 사단은 일본군을 역습했지만 여의치 않자 북서쪽으로 후퇴했다. 이후 이관교, 전핑현, 네이샹현이 잇다라 함락되었다. 29일, 이관교를 점령한 일본군은 당적구(挡贼口)로 들어갔고, 네이샹현을 장악한 일본군은 시샤커우와 스촨을 공격했다. 제5전구 68군, 신편 제8군과 제1전구 제85군, 제85군 1부는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수많은 사상자를 기록하며 저항했지만 일본군의 공세가 매우 매서워서 저지하지 못했다. 30일, 스촨이 함락되었다.
이 시기, 남양에서는 국민혁명군 제 88군 1개 사단이 1주일간 일본군과 격전을 치뤘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포위를 뚫고 성 동남쪽으로 후퇴했다. 이후 일본군은 랴오허커우를 포위하고 맹공격을 퍼부었지만, 수비군은 이를 모두 격퇴했다. 이시기 푸양이 함락되어 웨이허강이 위협을 받자, 45군을 제외한 나머지 수비군은 랴오허커우 북동쪽으로 이동했고 4월 2일에 주력군을 구성으로 옮겼다. 일본군 5천명이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우회공격을 개시하자, 제1전구 제85사단과 제78사단이 시샤커우, 매문관 등지에서 차례로 적을 저지했다.그러던 4월 5일, 국민혁명군이 역습을 개시해 7일 저녁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시샤커우에서 미제 전차를 탄 국민혁명군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린 일본군은 4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했다.
4월 8일 랴오허커우가 함락되었고 수비군 1개 사단은 서쪽으로 퇴각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마침내 랴오허커우를 공략하는 데 성공한 일본군은 주민들을 대량 학살해 분풀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