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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86년[1] 9월 14일 |
강원도 춘천도호부 (現 춘천시)[2] | |
사망 | 1935년 4월 9일 (향년 48세) |
분류 | 단양 우씨[3]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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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6년 9월 14일 강원도 춘천도호부(現 춘천시)의 양반가에서 우용연(禹龍淵)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원적지인 경기도 장단군 장북면 항동리[4] 591번지로 돌아와 본적을 두었고, 이후 항동리 597번지에도 거주했다.1919년 3월 29일 밤, 장단군 장도면 항동리 도덕암산(道德岩山) 위에서 마을 주민 수십명과 함께 봉화를 피우고 독립만세시위를 벌였고, 다음날인 30일 밤에도 마을 주민 70여명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장도면 고읍리(現 개성시 장풍군 고읍리) 소재 장도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계속해서 11시에는 군중 150여명과 같이 장도면 석주원리(現 개성시 장풍군 사시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그해 4월 2일 10시경 항동리 앞 장터에서 장단군 장남면 고랑포리(現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장터로 가는 군중 100여명을 모아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중 체포되었다. 이에 1919년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곧 공소하였으나,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다. 이에 또 상고했지만 9월 1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이 마사코 여왕과 혼인한 것을 기념하는 특별 사면으로 감형을 받고 석방되었다. 출옥 후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35년 4월 9일 사망하였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