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07:53:34

우아스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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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사파 잉카
우아스카르
Waskar Inka
파일:Waskhar_portrait.jpg
잉카 제국 제4대 황제
<colbgcolor=#DAA520><colcolor=#fff,#fff> 출생 미상
사망 1532년 (향년 불명)
페루 쿠스코
재위 기간 제12대 사파 잉카
1527년 ~ 1532년 (5년)
전임자 우아이나 카팍
후임자 아타우알파
칭호 즐거움의 태양
부모 아버지 : 우아이나 카팍 황제
종교 잉카 종교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잉카 제국의 제4대 황제이자 제12대 사파 잉카.[1]

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우아이나 카팍의 붕어 이후[2] 니난 쿠요치를 거쳐 황제로 즉위했으나, 야심많은 이복동생 아타우알파와의 내전에서 패배하면서 6년도 채 되지 못하고 제위에서 쫒겨난 황제였다.

2. 생애

우아스카르가 정확히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불확실하다. '우아스카르파타'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그 이름을 따 '우아스카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고, 그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황금 사슬에서 착안해 '우아스카'라는 이름을 받았으나[3] 그의 부황인 우아이나 카팍이 황자의 이름에 사슬이 들어간다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겨 일부러 뒤에 'r'을 붙여서 우아스카르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다. 이름의 유래가 어찌되었든 우아스카르는 우아이나 카팍 황제와 그의 여동생 사이에서[4] 태어난 적자였고, 덕분에 이른 나이부터 세력을 불리며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나갔다.

우아이나 카팍이 천연두로 붕어하고, 그가 지명한 정통 후계자인 니난 쿠요치마저 동일하게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수도 쿠스코의 귀족들은 우아스카르에게 대신 제위를 바쳤다. 그러나 이것을 바람직하게 보고 있지 않았던 또다른 황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타우알파였다. 에콰도르 지방인 키토의 여왕과 우아이나 카팍 황제 사이에서 태어난 아타우알파는 순혈 황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황제에 지명받지 못했고, 이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아타우알파는 제국 북부에서 군사를 모으며 반란을 준비했고, 이를 지켜볼 수 없었던 우아스카르는 먼저 아타우알파에게 전쟁을 선포하면서 잉카 내전이 터졌다.

우아스카르는 선공기습을 노리면서 아타우알파 군대를 분쇄했고, 아타우알파마저 포로로 붙잡히면서 잉카 내전에서 우아스카르가 승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관리 소홀(...)로 아타우알파가 몰래 감옥에서 탈출했고, 이후 키토 지방에서 다시 군세를 모아 우아스카르 군대를 격파하기 시작하자 우아스카르는 속절없이 밀려나갔다. 결국 황제 우아스카르의 세력은 침보라조 전투퀴파이판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모든 군사를 잃어버리고 포로로 잡혀 감옥에 갇혀버렸으며, 아타우알파측의 장군인 퀴즈퀴즈가 수도 쿠스코마저 함락시키면서 결국 우아스카르는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제위를 아타우알파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이렇게 내전에서 승리하며 인생역전하는 듯 보이던 아타우알파 스페인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카하마르카 광장 전투에서 포로로 사로잡히면서 순식간에 인생의 나락으로 추락했고, 감옥 속에서도 혹시나 스페인 병사들이 자신을 죽이고 우아스카르를 다시 황제로 만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아타우알파는 몰래 명령을 내려서 감옥에 갇혀있었던 우아스카르를 처형하도록 했다. 또한 스페인 병사들에게 '우아스카르가 얼마의 황금을 제시하든, 내가 그 2배를 줄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목숨을 구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3. 기타

  • 간혹 우아스카르를 신하의 아내를 강탈하고 사람들을 죽여대는 폭군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이 주장은 좀 신빙성이 떨어진다.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의 일대기를 쓴 스페인의 후안 데 베탄조스는 옛 아타우알파의 아내와 결혼했고, 그 아내가 말해준 것을 자신의 책에 많이 집어넣었다. 당연히 아타우알파의 아내가 우아스카르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을리가 없으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아스카르는 집권 초기 옛 고토들을 재정복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등 사회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가 내전을 벌이면서 병력을 소모해버리는 바람에 잉카 제국은 정작 스페인 병사들이 당도했을 때 이들과 싸울 국력을 모두 소진해버리고 말았다. 사실상 형제 간의 다툼이 제국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었다.

[1] 본격적인 정복 활동을 벌인 파차쿠티 시절부터가 제국의 황제이고, 이전의 잉카 지도자들은 쿠스코 왕국의 군주였다. [2] 우아이나 카팍은 유럽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옮겨온 천연두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사슬'은 케추아어로 '우아스카'이다. [4] 잉카 황실에서는 혈통 보존을 위해 근친혼이 성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