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9 15:43:03

우마이야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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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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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내부

1. 개요2. 역사3. 구조
3.1. 황금 모자이크3.2. 보물의 돔3.3. 세례 요한 성지3.4. 후세인 빈 알리 성지3.5. 미나렛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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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시절 다마스쿠스에 지어진 거대한 모스크. 다마스쿠스 대사원으로도 불린다. 본래 아람인들의 하다드 신전이다, 로마 제국기 유피테르 신전, 동로마 제국기 성 요한 성당을 거쳐 8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왈리드 1세가 모스크로 개조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가장 큰 이슬람 사원 중 하나로 다마스쿠스의 랜드마크이자 자랑거리다.

기본적으로 수니파 이슬람 사원이나 세례자 요한의 무덤이 있어 기독교도들도 참배하고, 카르발라 참극 후 이맘 후세인의 머리가 200년간 안치되었던 곳으로써 쉬아 무슬림들에게도 큰 순례지이다. 건축적으로는 비잔틴 양식의 황금 모자이크가 유명하며, 기독교 성당 시기의 바실리카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천년이 넘는 역사 동안 수십 차례 증축과 보수가 있었음에도 건설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역사성이 뛰어나다. 당연히 다마스쿠스 구도심의 일환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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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5년 즉위한 왈리드 1세는 제국의 아랍화 및 중앙집권화를 완성할 사업으로, 수도 디마슈크의 성 요한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는 것을 택했다. 이슬람 정복 후 그때까지 디마슈크의 모스크는 성 요한 성당 옆, 메카 방면인 남쪽 회랑에 작은 사원을 세워 이용해왔다. 하지만 점차 개종자 및 무슬림 인구의 자연 증가로 예배 공간이 부족해졌다. 대서양에서 파미르에 이르게 된 이슬람 대제국의 수도가 중앙 사원을 이교도 사원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무슬림들에게 불편한 사실이었다. 앞서 두 칼리파들이 기독교 공동체와 성당 할양을 놓고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한 바 있었다. 693년 예루살렘에 바위의 돔을 세운 부친처럼 명성을 남기고 싶었던 왈리드는 즉위 이듬해인 706년, 재차 협상에 나서 시내에 추가로 3개의 성당 부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성 요한 성당과 신전 단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로써 여전히 정교회 수중에 있던 성 마리 성당이 디마슈크의 중심 성당이 되었다. 이슬람이 약 1500년간 이어진 디마슈크의 종교적 중심을 접수한 것.

기존 성당과 모스크가 모두 철거되는 것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 도중 지하 동굴에서 야흐야의 머리가 담긴 유물함이 발견되었다. 이에 왈리드는 친히 들어가 확인한 후 다시 매장하고, 그 위에 성소를 세우게 하였다.[1] 7년치 예산에 맞먹는 백만 디나르에 이르는 비용과 콥트, 이란, 그리스, 힌두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1만 2천명의 장인들이 동원된 대역사는 10여 년이 걸렸고, 왈리드는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고 마감 공사가 진행되던 715년 초에 사망하였다. 대사원은 다음 칼리파인 술라이만의 즉위 직후에야 완공되었다. 모스크는 메카 방면인 남쪽 회랑을 3배로 증축하여 중심으로 삼았고, 안뜰에서 바라본 건물 외벽은 그리스 장인들에 의해 (이슬람 관념의) 천국을 묘사한 황금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화려함을 뽐내었다.

또한 현재의 단일 돔과 달리 당시에는 하기아 소피아처럼 2개의 작은 돔이 중심 돔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12세기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는 목재로 만들어진 이들 돔에 세겨진 화려한 장식에 감탄하며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1893년의 화재로 현재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놀랍게도, 내부의 모자이크와 대리석 패턴은 더욱 화려했다고 한다. 대사원은 북쪽 외에 남쪽에도 회랑으로 둘러쌓인 안뜰을 두고 녹색 궁전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사원, 열주 회랑으로 둘러쌓인 안뜰, 궁전의 배치는 다른 우마이야 왕조 시대의 도시들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지붕에 덧씌울 납을 조달하기 위해 고대 석관까지 털었다고 한다. 한편 왈리드는 이 외에도 707-9년 메디나의 무함마드 집터에 예언자 모스크, 709-14년에 바위의 돔 옆에 알 아크사 모스크를 세웠다. 메디나, 예루살렘의 성지와 함께 수도 디마슈크가 대역사의 장으로 선택된 것. 이러한 건축들은 기존 문명들에 대한 이슬람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었다.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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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 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2천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벽으로 둘러져 있기에 장엄한 분위기가 감돈다.

3.1. 황금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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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아름다운 모자이크는 705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휴전을 기념해 파견해 준 장인들의 손길로 탄생한 것이다. 기둥을 제외한 모든 벽면이 그러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었다. 비록 현재는 중앙부를 제외한 모자이크가 소실되었지만, 라벤나의 산 비텔레 성당과 함께 현존하는 후기 로마 모자이크를 옅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로마식 성당과 달리 내부 외에 외부까지 모자이크로 도배한 것은 우마이야 대사원이 유일무이하다. 세월이 지나며 화재와 풍화 등으러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되자 13세기 바이바르스 시기에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그러다 1893년의 대화재로 회랑과 내부의 모자이크는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처럼 파사드 및 회랑 외부 일부에만 남아있다.

3.2. 보물의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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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바스 왕조 시기에 세워졌다. 780년, 디마슈크 총독이던 압바스 왕족 알 파들은 대사원 뜰에 정확한 예배 시간을 알려줄 시계의 돔을 세웠다. 786년에는 안뜰에 사원의 와크프 (재단) 재산을 수용할 보물고 (바이트 알 마알)을 세웠다. 789년 보물의 돔이 완공될 무렵 알 파들은 생을 마감하였다.

3.3. 세례 요한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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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로는 '마깜 나비 야흐야'로 부른다. 8세기 초 모스크 건설 공사 도중 지하 동굴에서 야흐야의 머리가 담긴 유물함이 발견되었다. 이에 왈리드는 친히 들어가 확인한 후 다시 매장하고, 그 위에 성소를 세우게 하였다.

건물 자체는 앗 사카섹이라 불리며, 현재의 건물은 1893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오스만 당국이 중건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일하게 기독교도 출입이 허가된 예배당 구역이었다. 현재는 예배 시간 외에는 누구나 내부 방문이 가능하여 별 문제 없이 둘러볼 수 있다.

3.4. 후세인 빈 알리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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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대사원 동쪽 회랑의 후세인 수급이 전시된 곳 (좌) 및 묻힌 곳의 벽감 (우)

680년 카르발라 참극 후 후세인의 수급과 그 가족들은 디마슈크의 사원으로 압송되어 60일간 감금되었다. 이때 후세인의 수급은 3일간 사원 벽에 전시되었다. 이곳은 사이다 제이납 모스크와 함께 디마슈크의 양대 쉬아 성지이다.

3.5. 미나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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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경 대사원 북쪽에 세워진 신부 미나렛 대사원 동남쪽에 세워진 이사 미나렛

모스크의 첨탑인 미나렛이 처음 세워진 곳 역시 우마이야 대사원으로 추정된다. 아루스 (신부) 미나렛은 831년경 세워졌고, 현지 전승에 따르면 당시 시리아의 군주와 결혼한 상인의 딸이 지붕의 납을 제공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069년 화재로 붕괴했으나 1174년 살라흐 앗 딘이 복원하였다. 이때 지붕 위의 첨탑이 더해졌다.

세 미나렛 중 77m 높이로 가장 높은 이사 미나렛 역시 9세기 건립으로 추정되며, 1245년에는 아이유브 내전 중의 포격으로 붕괴했다가 1247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다만 팔각형의 첨탑은 오스만 시기에 더해졌다. 무슬림 이븐 알 핫자즈의 하디스에 의하면 심판의 날 새벽에 예수가 이곳에 재림하여 마흐디 뒤에서 기도한 후 적그리스도와 싸우러 간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이사 (예수) 미나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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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원 서남쪽의 카이트베이 미나렛 (1488년 완공)
이사 미나렛처럼 기존 로마시대 성탑 위에 세워진 8각 첨탑으로, 맘루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대사원에 더해진 마지막 주요 구조물이기도 하다.

[1] 알 사카섹이라 불림,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오스만 당국이 중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