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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7D1><colcolor=#000>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요아힘 1세 네스토어 Joachim I. Nestor, Kurfürst von Brand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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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84년
2월 21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쾰른[1] |
사망 |
1535년
7월 11일 (향년 5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슈텐달 |
재위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선제후 |
1499년 1월 9일 ~ 1535년 7월 11일 | |
배우자 | 덴마크의 엘리자베트 (1502년 결혼) |
자녀 | 요아힘 2세 헥토어, 안나, 엘리자베트, 마르가레테, 요한 |
아버지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치체로 |
어머니 | 튀링겐의 마르가레테 |
형제 | 안나, 우르줄라, 알브레히트[2] |
종교 | 가톨릭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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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치체로와 튀링겐의 마르가레테의 차남[3]으로 1499년 부친의 뒤를 이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었다.동생 알브레히트를 마인츠 대주교로 앉히기 위해 푸거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렸으며, 자신의 표와 동생의 표를 이용해 막시밀리안 1세 사후 황제선거가 열리면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배출해보겠다는 야심을 품었으나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가 푸거 가문으로부터 더한 대출을 받아 호엔촐레른 가문의 황제 등극은 물거품이 되었고 본인도 카를로스 1세를 선출했다.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에 비아드리나 대학교를 세우는 등 나름 브란덴부르크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골수 가톨릭으로서 종교 개혁을 반대하는 선봉장이었고, 이때문에 안스바흐 분가의 사촌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 프로이센 공국 공작 알브레히트 형제와 갈등을 빚었다.[4] 결국 부인 덴마크-노르웨이의 엘리자베트가 반발하여 작센 선제후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굴욕감을 느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분사했다. 맏아들 요아힘이 그를 승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