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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이

파일:중국 인민해방군기.svg 중국 인민해방군 역대 공군사령원 파일:중국 인민해방군 공군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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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야러우 우파셴 마닝 장팅파 왕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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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솽밍 위전우 류순야오 차오칭천 쉬치량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마샤오톈 딩라이항 창딩추 . .

왕해 (王海 : 1926년 1월 19일~)

1. 개요2. 청년기3. 정비사에서 조종사로4. 중국 공군 창설5. 첫 격추에 실패6. 설욕7. 중국 공군의 탑건8. 문혁의 광풍을 헤치고9. 과거의 숙적에서 친구로

1. 개요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의 군인.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조종사 중에서 가장 많은 UN 공군기를 격추한 에이스 파일럿이며, 나중에 공군 상장(空軍上将)까지 진급하여 중국 공군 사령원을 역임했다.

2. 청년기

산둥성(山東省) 복산현(福山県)[1]에서 1926년 1월 19일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왕영창(王永昌)이었다. 1930년에 그가 걸음마를 뗀지 얼마 안된 4살이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항구도시인 웨이하이(威海)로 이사를 가서 살게 된다. 1944년 5월에 소련 콤소몰에 해당되는 산둥 웨이하이 청년중대(山東威海青年中隊)에서 열성적인 대원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9월 1일에는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원이 되었다. 그해 연말부터 왕해는 산둥린쯔 인민혁명대학(山東臨淄人民革命大学)[2]에 진학하여 그곳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게 된다.

3. 정비사에서 조종사로

이듬해인 1946년 6월부터 왕해는 만주 지린성 퉁화(通化)에 세워진 동북민주연군항공학교(東北民主連軍航空学校)로 옮겨가 항공정비사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이 과정을 조종원이 되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동북항교(東北航校)로 불린 중공 최초의 비행학교는 오래되고 버려진 민간 비행장을 보수한데다, 국공 내전이 한창일 때여서 시설이나 보급 사정이 말도 안되게 열악했었다.
"식당이란 곳은 6명이 앉을 테이블밖에 없어서, 늦게 오면 서서 먹어야만 했지요. 진흙을 구워 만든 식기에 수북하게 잡곡밥이 담겨나오는데, 찬도 형편없었습니다. 그나마 일요일에는 둔전에 나가 채소를 기르고, 외지에서 요리사가 출장와서 고기요리를 하고 큰 빵을 구웠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즐기는 만찬에 달려든 우리는 먹고 또 먹고 수저에서 손을 놓지 않았죠. 우리 학교가 있는 퉁화는 겨울이면 영하 40도까지 떨어져, 숙사 안에 비치된 물동이의 물이 아침에 일어나 보면 꽁꽁 얼어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휘발유가 떨어져가자 우리는 연료 없이 어떻게 훈련을 해야할지 고민해야만 했죠. 총명한 우리 기술자가 휘발유 대신 알콜을 항공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지 실험하기도 했답니다. 나중에 이 연구는 제법 그럴싸해져서, 엔진의 연료 분사구를 확대하고 더 많은 알콜을 분무하게 개조해서 하얼빈에서 생산된 알콜을 넣고 작동하자 날 수 있습니다."

동북항교는 1947년부터 공군이 창설되기 전까지 126명의 조종원과 332명의 정비원, 기타 요원 88명을 양성해냈으며, 이들은 초기 인민해방군 공군의 씨앗이 되었다. 내전 말기인 1947년에 퉁화 비행장에 국민당 공군이 폭격을 가해 이들은 무단장으로 소개했지만, 만주에 관동군이 만들었던 여러 비행장을 활용할 수 있어 교육은 계속될 수 있었다.

정비 교육을 통해 항공이론 학습을 하던 그는, 마침 공군 창설을 앞두고 조종사 인력을 확장하기 위한 비행반에서 조종원 모집을 하자 곧바로 수험에 응모해 합격하게 된다. 왕해는 1948년 4월부터 비행반 제2기생 훈련을 받고 비행원이 되었다. 다소 뜻밖이지만, 당시 이 항공학교의 교관들은 과거 중국군의 숙적이었던 관동군 제2항공군(第2航空軍)의 독립 제101교육비행단(独立第101教育飛行団) 제4연성비행대(第4練成飛行隊)를 지휘한 경력이 있는 하야시 야이치로(林弥一郎 : 1911~1990) 소좌를 중심으로 모인 일본군 출신이며, 왕해는 그들 300여명의 일본 조종사들이 고향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교류를 계속했다고 한다.

4. 중국 공군 창설

1949년 11월 11일,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 공군(人民解放軍空軍)이 창설되었음을 공식 석상에서 발표했고, 비행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왕해는 공군 제4항공학교(空軍第四航空学校)에서 신참 비행원들을 가르치는 교관 조종사로 복무하게 된다. 이 시기, 소련으로부터 최신예 제트 전투기인 MiG-15를 도입한 중국은 일선 전투비행원들을 기종전환 훈련을 시키는 한편, 소련 공군에 조종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왕해는 1950년 5월 14일에는 공군 제4혼성여단(第4混成旅)에서 자기 휘하에 1개 비행중대를 거느린 비행중대장이 되었다. 같은 해 6월에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10월 1일에 항미원조를 외친 중국은 한반도 파견에 대비하여 공군 제3사단(空軍第3師)를 셴양(瀋陽)으로 전진 배치하는 한편, 왕해는 제9연대(第9団) 예하의 제1대대장 지휘관 보직이 주어졌다. 공군 제3사단은 1951년 4월 25일부터는 중국 인민지원군공군(中国人民志願軍空軍)의 전투서열에 통합되며 지휘 하에 들어갔다.

5. 첫 격추에 실패

그가 처음으로 미군기를 상대로 전과를 거둔 것은 1951년 11월 9일로, 항미원조 작전을 시작한지 19일 만이었다. 이날 아침 안퉁 기지에서 18대의 미그기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출격한 그는 9시 44분 경에 평양 남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미 공군 F-84 전폭기 8대로 이뤄진 공습부대를 포착했다. 왕해 대대는 미군 편대의 측면으로 돌아가 추격을 개시하며 감시했지만, 적기들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 같은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미군기들은 고공에서 폭탄을 떨구더니 9시 51분에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 귀환 코스에 접어들었다. 왕해 대대장이 공격을 개시하려는 순간, 무전기를 통해 부근에서 글로스터 미티어 F Mk.8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폭격을 마치고 돌아가는 적기보다는 아군의 상황을 사진으로 찍으며 정찰하는 적기를 돌려보내는 것이 더 손해라는데 생각이 미친 왕해는 자신의 편대는 그 정찰기의 뒤를 쫓고 나머지 부하들에게는 F-84를 요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 글로스터 미티어를 모는 영연방 조종사는 아주 노련했다. 그 쌍발 제트기는 미그기보다 훨씬 느리고 둔했으나, 저공으로 바싹 내려가 지형을 이용해 지그재그로 민첩하게 비행하며 왕해가 쏘는 기관포 세례를 교묘하게 빗나가게 만들고 있었다. 수 차례나 사격을 퍼붓던 왕해는 곧 탄을 모두 써버렸고, 요기를 대신 쫓게 한 다음 자신은 윙맨으로 뒤로 빠졌다. 정찰기는 거의 100 km를 도주했고, 38도선을 넘기 직전에야 간신히 격추시킬 수 있었던 그는 기지로 돌아온 후 무엇이 문제였는지 곰곰 생각하게 된다.

6. 설욕

9일 후, 첫 번째 요격의 실패에 대한 설욕을 노리고 있던 왕해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51년 11월 18일 오후, 미 제9공군의 전투기와 폭격기 184대가 평양 북방의 공업지대를 폭격하기 위해 이북으로 넘어온 것이다. 오후 2시 24분에 린후(林虎 : 1927~2018 / 1.5킬)가 이끄는 제9대대의 미그기 16대가 먼저 발진해 요격에 나섰다. 이들은 왕해 대대와 합류하여 8,000 m 고도로 초계비행을 하다가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있는 F-84 전폭기 20대로 구성된 편대를 발견하고 공격을 가했다. 왕해 역시 스로틀을 밀면서 돌격하려고 했지만, 곧바로 좌전방에서 60대의 적기가 더 다가오고 있는 섬뜩한 광경를 목격했다. 적기의 고도는 6,500 m였다. 왕해는 편대원들을 호출한 다음 곧바로 대대원 전체에게 목표를 바꿔 새로 나타난 미군기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불시의 습격에 깜짝 놀란 미군기들은 곧바로 폭탄을 내던지고 뿔뿔히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중에 몇몇은 성능이 훨씬 우수한 미그기에 용감하게 맞섰다. 왕해가 공격하려 한 공습부대의 선두 편대가 그랬다. 그들은 위쪽에서 미그기가 달려들자 달아나거나 곧바로 상승해 맞서지 않고 마치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침착하게 2개 편대가 갈라지더니 서로의 꼬리를 물면서 거대한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놀라운 팀웍이었다. 미군기들이 능숙하고 재빨리 러프베리 서클 전술을 펼치자, 왕해는 함부로 뒤에 붙을 수가 없게 되었고, 다시 상승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눈 아래 500 m 에서는 여전히 8대의 F-84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대대장 왕해는 자신의 기체를 급강하시켜 가파른 각도로 거의 그 원의 중앙을 통과할 기세로 달려들었다. 미그기의 기수에 달린 37mm와 23mm 기관포가 동시에 불을 뿜자, 공포에 질린 미군기 몇 대가 원에서 빠져나가며 흩어졌다. 방어대형이 깨진 것이다! 곧바로 달려든 왕해와 그 뒤를 따르던 윙맨 자오징웬(焦景文 : 1926~ / 3킬)이 각각 1대씩의 미군기에 불을 붙였고, 그 기체들은 금새 추락했다. 왕해 대대원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순솅루(孙生禄 : 1928~1952 / 6킬)가 또 1대의 F-84를 격추시켰다. 방어대형을 벗어난 F-84는 도저히 속도와 상승률, 화력에서 상대가 안 되는 미그기의 밥으로 전락했고, 왕해와 순솅루는 1대씩을 더 격추시켰다. 순솅루의 탑승기는 미군기와 교전하다가 기총 사격에 동체와 날개에 20여개의 구멍이 뚫린 상태로 연기를 뿜고 있었고, 왕해와 부하들은 그를 엄호하면서 전 기체 모두 무사히 귀환했다. 중국 공군 미 공군을 상대로 아무런 피해도 없이 5대를 격추시킨 이 공중전은, 제트 공군으로 발돋음한 중국 공군이 처음으로 제트 전투기를 격추시킨 역사적인 사건으로 남게 된다.

7. 중국 공군의 탑건

1951년 10월 21일부터 이듬해인 1952년 1월 14일까지 86일 동안 중국 공군 제3사단은 UN 공군기를 64대 격파했고, 그중에서 왕해가 이끄는 9연대 1대대는 선두에 서서 15대를 격추시키는 댓가로 5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이것은 이 전쟁에 참가한 중국 공군 전투기 대대 중에서 가장 높은 전과여서, 중국은 왕해의 활약을 선전 매체를 통해 적극 홍보하며 영웅적 왕해 대대(英雄的王海大隊)라는 부대명까지 붙여주게 된다. 이즈음 중국에서는 왕해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라고 하니, 이 경력은 그의 출세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 이로 인해 왕해는 곧 제9연대의 부연대장으로 승격했고, 1952년 11월에는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제9전투기연대를 이끄는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최연소 연대장이란 기록으로 남게 된다.
"항미원조전에서 주더(朱德 : 1886~1976) 총사령이 지휘한 우리 공군은 항공기 330대가 추락하고 95대가 못쓰게 된 반면, 미국 비행기 231대를 격추시켰습니다. 우리 조종사들이 처음 실전에 출격했을 때 대부분 제트기로는 20~30시간의 짧은 비행경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나마 프로펠러 전투기로 10시간을 더할 수 있었으니 조금은 나았지만, 평균 1,000시간 이상 비행한 미국 조종사들에 비하면 햇병아리나 다름없었지요. 하지만 그 무렵 미군이나 우리나 제트기로 전투를 해본 조종사는 아무도 없었고, 이 조건은 피아의 실력 차이를 크게 좁힐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불한 댓가는 여전히 큽니다. 나 역시 미군기에 격추되어 낙하산으로 탈출한 적이 있었지요. 우리는 116명의 젊고 용감한 조종원들을 희생하는 큰 댓가를 지불했습니다. 우리 대대도 순솅루와 류더린(刘德林), 자오준우(阎俊武), 티안유(田宇) 같은 뛰어난 편대원들을 잃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그가 거둔 최종 전과는 9대 격추로, 마찬가지로 9대 격추를 주장하는 자오 바오퉁(赵宝桐 : 1928~2003)과 더불어 톱건이 되는 전적을 남기고 당으로부터 1급 전투영웅(一級戦闘英雄)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가 전쟁 당시 몰았던 소련제 MiG-15 전투기는 베이징에 있는 중화 인민혁명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8. 문혁의 광풍을 헤치고

귀국한 왕해는 부사단장(副師長)을 거쳐 사단장이 되었다. 한편, 내전에서 중국공산당에 밀려 타이완으로 옮긴 장제스의 국부군(國府軍)은 여전히 상하이 해안에서 하이난 섬에 이르는 중국 동남부 연안의 섬들과 그 부근의 본토 해안에서 중공군에 대한 군사 작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이난 섬은 1950년 5월 1일에 함락시켰지만, 본토 부근의 이장산다오(一江山島)와 다천군도 같은 섬들은 여전히 중화민국의 지배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1955년 1월부터 장아이핑(張愛萍)이 지휘하는 중공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화민국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이장산다오에 3군 합동상륙작전을 시도한 이장산 전투에서 사단장 왕해는 직접 조종간을 잡고 참전했고, 미 7함대가 대만군을 지원했음에도 섬을 함락시켰다. 중국군에 계급 제도가 부활하자 소장 계급장을 어깨에 단 왕해는 1965년에 부군단장(副軍長), 1969년에 공군사령부 군훈부(空軍司令部軍訓部第2部長) 제2부장을 역임했다. 얼마 후 문화대혁명의 몰상식한 광풍이 불면서 과거 국공 내전과 한국전쟁에서 싸운 전쟁영웅들까지 종종 몰락하거나 숙청당했지만, 왕해는 공군 내부의 린뱌오(林彪) 파와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1971년에 중국 정계와 공군을 뒤흔든 린뱌오 사건이 터졌을 때도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9. 과거의 숙적에서 친구로

1975년 7월에 중장으로 승진한 그는 광저우 군구 공군사령원, 1982년 11월에는 공군 부사령원이 되었으며 1984년 7월에는 국방부장 장아이핑과 함께 미국대사관에 방문해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 조종사로 참전하여 P-51 머스탱과 F-86 세이버 전투기를 몰면서 미그기 2대를 격추시킨 찰스 A. 가브리엘(Charles A. Gabriel : 1928~2003) 미 공군 참모총장과 악수를 나누고 예전의 전투에 관해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1985년 7월에 왕해는 드디어 공군 최고위직인 공군사령원에 취임하여 같은 해 10월 중국을 방문한 가브리엘 장군을 다시 맞이했다.
"당시 주미대사관에서 공군 무관을 지낸 장웨이이(张伟仪)는 나와 함께 펜타곤에 있는 가브리엘 장군의 사무실까지 걸어갔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인사를 나누고 보니, 그의 책상에 여러 개의 모형 비행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나는 조종사여서 그때나 지금이나 비행기 모형을 무척 좋아합니다. 내가 사무실 책상에 놓인 F-86 모형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자니까, 그 전투기는 우리 대대가 한반도에서 맞아 싸운 것이어서 잠시 추억이 살아났습니다. 당시 상급 부대는 미 공군이 갖춘 F-86의 규모는 2개 여단이며 하나는 51연대, 또 하나는 4연대라고 통보했었습니다. 실제로 하늘에서 마주친 제51전투비행대대의 F-86은 양 날개에 노란 띠를 두르고 있었고, 4비행대대의 기체에는 이 노란 띠가 없어서 쉽게 식별이 됐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브리엘 장군에게 말했습니다."

"노란 띠가 그려진 F-86은 당신이 복무한 제51비행대대겠군요."

그러자 가브리엘 장군은 깜짝 놀라며 말하더군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나는 한국 전장에서 노란 띠를 두른 F-86을 자주 만났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미군의 다른 부대에는 노란색 라인이 그려진 전투기가 없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싸워본 바로는 노란 띠의 F-86 조종사들이 전술이 더 뛰어나고 실력도 좋은 강적이었으니까요. 제4비행대대는 그렇게 날 수 없었습니다."

가브리엘 장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하더군요.

"나는 한국전쟁에서 제51전투비행대대에서 복무했고, 바로 그 부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당신들도 상당히 잘 싸우더군요."
"그때부터 우리의 대화는 술술 풀려나갔고,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만 느낌이었습니다. 인생이란 참 이상하지요?"


공군 상장 왕해는 1992년 11월에 군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어언 28년이 지나 94세의 노인이 되었다. 2000년에는 <내 투쟁의 생애(我的战斗生涯)>라는 회고록을 펴냈고, 2019년에는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에서 항미원조전쟁 다큐멘터리를 시리즈로 제작하면서 미그 협곡에서의 항공전에 관한 에피소드를 만들 때, 당일 그 역사적인 공중전을 직접 지휘했던 왕해를 찾아가 인터뷰와 증언을 촬영할 수 있었다. 94세의 노인이지만 왕해는 아직도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1] 현재 산둥성 옌타이시 [2] 나중에 산둥대학으로 통합된 학교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