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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명 | 오희영(吳姬英) |
출생 | 1924년 4월 23일 |
중화민국
지린성 액목현 (現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시 어무진) |
|
사망 | 1969년 2월 17일 (향년 44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본관 | 해주 오씨[1] |
가족 |
아버지
오광선, 어머니
정현숙 여동생 오희옥 배우자 신송식 |
서훈 |
대통령표창 수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오희옥은 여동생이며, 독립유공자 신송식은 그의 남편이다.2. 생애
1924년 4월 23일 중국 지린성 액목현(現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시 어무진)에서 부친 오광선과 모친 정현숙 사이의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이다. 그녀는 15살 때인 1939년 한국광복진선 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해 연극을 통한 선전활동에 관여했다. 이후 충칭에서 충칭시립 중학교에 다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뒤 여기에 입대했으며, 1942년 4월 제3지대 징모처제6분처라는 명칭아래 안휘성 부양으로 떠났다.징모제6분처도 안휘성 부양에 근거를 두고 대적 각종 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녀는 오광심, 지복영, 신송식 등과 함께 일본군에 강제 동원된 한인들을 초모하는 공작 활동을 수행했다. 1944년에는 부양에서 군사 교육 훈련을 마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단의 1기 졸업생들과 함께 신송식 교관의 인솔하에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는 충칭으로 가서 한국독립당에 가입했다. 또한 중경 임시정부 주석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4년 임정요인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던 토교에서 한필동 목사의 주례로 신송식과 혼인식을 올렸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선전 활동을 하던 오희영과 그 가족은 해방을 맞아 다른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충칭에서 배를 타고 양자강을 내려와 난징에서 기차로 갈아타고 상하이로 간 후, 상하이에서 귀국선을 타고 부산을 경유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 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9년 2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오희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4년 그녀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1]
사복시경공파-처사공파 2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