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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힌체

Otto Hintze
1861년 8월 27일 ~ 1940년 4월 25일
1. 개요2. 생애 및 업적

1. 개요

오토 힌체는 독일의 역사학자이다. 힌체는 프리드리히 마이네케와 더불어 20세기 초반 독일 역사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역사학적 관점에서 헌법사를 개척하였으며, 마르크 블로크와 더불어 비교사의 선구자로도 평가된다. 그의 논문들은 현재까지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2. 생애 및 업적

현재 폴란드령인 포메른 지방의 소도시 피르지체(Pyrzyce, 독일어 Pyritz)에서 태어난 힌체는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특히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에게서 수학했다. 1884년 베를린 대학에서 율리우스 바이츠재커(Julius Weizsäcker)의 지도하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프로이센 사료 간행 프로젝트인 악타 보루시카(Acta Borussica)의 편집 작업에 참여했으며, 1902년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12년 유대인인 헤트비히 구겐하이머[1]와 결혼하였다.

힌체는 헌법사(Verfassungsgeschichte) 분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힌체는 동시대인인 막스 베버와 더불어 봉건제 및 신분제 국가, 자본주의를 비롯하여 근대 국가 및 헌법사와 관련된 주요 개념들을 정립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쳤다. 1차 대전 발발 이전에 힌체는 국가형성과 헌법발전(Staatenbildung und Verfassungsentwicklung, 1902), 국가헌법과 군대조직(Staatsverfassung und Heeresverfassung, 1906)과 같은 논문들에서 헌법사 및 국가 형성과 관련된 중요한 관점들을 제시했는데, 이는 현재에 와서는 고전으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국가헌법과 군대조직은 유럽 근대 국가 형성에 있어 군사적 경쟁과 전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베버의 '폭력의 독점' 이론과 연결되어 사회학에서 국가 형성을 설명하는 고전적인 모델로 자리잡았다.

한편 힌체는 좌파 자유주의 성향에 속하면서도 프로이센 전통과 독일 제국의 입헌주의적 정치 체제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베버가 독일 제국의 정치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과 다르게, 힌체는 1911년 발표한 논문 군주제 원칙과 입헌헌법(Das monarchisches Prinzip und die konstitutionelle Verfassung)에서 특수이익을 대리(Vertretung)하는 의회는 국가 전체를 대표(Repräsentativ)할 수 없다는 논리로 독일식 입헌군주제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인 1915년 힌체는 프로이센 정부의 의뢰로 호엔촐레른 왕조의 브란덴부르크 통치 500주년을 기념하는 저작인 호엔촐레른과 그 업적(Die Hohenzollern und ihr Werk)을 출간했다. 이는 힌체의 단행본 중 거의 유일하게 현재까지도 의미를 지니는 저작으로, 중요한 프로이센 역사 서술로 평가된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힌체는 마이네케와 더불어 심정적으로는 군주제를 지지하나 이성적으로는 공화국을 지지하는 '이성적 공화주의자(Vernunftsrepublikaner)' 집단에 속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1920년 베를린 대학 교수직을 사임한 이후 힌체는 봉건제의 본질과 확산(Wesen und Verbreitung des Feudalismus, 1929), 서구 신분제 헌법의 유형론(Typologie der ständischen Verfassungen des Abendlandes, 1930), 대의제 헌법의 세계사적 조건들(Weltgeschichtliche Bedingungen der Repräsentativverfassung, 1931), 근대 국가의 본질과 전환(Wesen und Wandlung des modernen Staats, 1933)과 같은 중요한 논문들을 잇달아 출판하며 비교 헌법사 연구에 전념하였는데, 이는 마르크 블로크와 더불어 비교사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나치가 집권한 이후 유대인과 결혼하였던 힌체의 학술 활동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아내 헤트비히는 프랑스로 이주하여야 했고, 1933년부터 1939년까지 파리와 베를린을 통근하면서 힌체를 간호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0년 힌체는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힌체 사후 1941년에서 1943년 사이 그의 제자이자 중요한 독일 헌법사 개관을 출간했던 프리츠 하르퉁(Fritz Hartung, 1883-1967)은 그의 저작 모음집을 출간하였으나 전쟁 중이었던지라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하르퉁의 제자이자 초기 근대 헌법사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남긴 게르하르트 외스트라이히(Gerhard Oestreich, 1910-1978)의 주도하에 그의 저작집이 재출간[2]되면서 힌체는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태동하던 한스-울리히 벨러와 위르겐 코카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사가들은 힌체의 사회사 및 비교사적 접근에 큰 영향을 받았고, 힌체를 베버와 더불어 그들의 방법론적 선조로 여겼다.


[1] Hedwig Guggenheimer, 1884-1942. 후에 헤트비히 힌체가 된다. 헤트비히 힌체는 마이네케의 지도를 받아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독일 최초의 여성 역사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힌체 사후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가 병원에서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2] 1권 Staat und Verfassung. Gesammelte Abhandlungen zur allgemeinen Verfassungsgeschichte(1962) 2권 Soziologie und Geschichte. Gesammelte Abhandlungen zur Soziologie, Politik und Theorie der Geschichte.(1964) 3권 Regierung und Verwaltung. Gesammelte Abhandlungen zur Staats-, Rechts- und Sozialgeschichte Preußens(1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