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하마 FC 회장 겸 스포츠 디렉터 | |
오쿠데라 야스히코 奥寺 康彦 | Yasuhiko Okudera |
|
출생 | 1952년 3월 12일 ([age(1952-03-12)]세) |
아키타현 카즈노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키 177cm / 체중 75kg |
학력 | 쇼난공과대학부속고등학교 |
포지션 | 풀백, 미드필더, 윙 포워드 |
소속팀 |
후루카와 전기 (1970~1977) 1.FC 쾰른 (1977~1980) 헤르타 BSC (1980~1981) SV 베르더 브레멘 (1981~1986) 후루카와 전기 (1987~1988) |
지도자 |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 (1996) 요코하마 FC (2017) |
국가대표 | 32경기 9골 ( 일본 / 1972~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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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 축구 선수이자 요코하마 FC의 구단주. 동아시아 최초로 유럽 리그(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선수이다.[1]2. 선수 커리어
2.1. 클럽
1970년 JSL의 후루카와 전기[2]에 입단하여 1976년 JSL과 천황배을 우승하고 1977년 JSL컵을 우승했다. 이후 1977년 여름 독일 분데스리가의 1.FC 쾰른으로 이적하여 1977년 10월 5일 유럽 리그에 출전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가 되었다. 1977-78 시즌 전체 24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하여 쾰른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DFB-포칼 우승을 거머쥐어 아시아 선수 최초로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하였고, 1978-79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에 출전하여 4강 1차전 노팅엄 포레스트 FC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어[3] 아시아 선수 최초로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을 기록했다.1980-81 시즌을 앞두고 2. 분데스리가에 있던 헤르타 BSC로 이적했다. 참고로 쾰른 시절에는 왼쪽 윙 포워드였지만 이때부터 오른쪽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고 한다. # 이후 한 시즌 만에 분데스리가로 돌아와 오토 레하겔 감독이 이끄는 SV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하여 3번의 분데스리가 준우승을 하며 1986년까지 활약했다. 통산 기록은 총 234경기 출전 26골.[4]
1986년 여름, 오쿠데라는 오랜 독일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전 소속팀인 후루카와 전기로 복귀했고,[5] 1988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1972년 7월 12일,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캄보디아와의 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했다. 그 후 1976 AFC 아시안컵 지역 예선과 1978 FIFA 월드컵 지역 예선에도 출전했지만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하던 기간(1977~1986년)에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 34세의 나이에 일본 대표팀에 복귀해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다. 이후 1987년 1988 서울 올림픽 지역 예선을 끝으로 일본 국가대표 커리어를 마감했다.당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시아에서도 중하위권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명성에 비해서는 많은 A매치를 소화하진 못했으며 메이저 대회 출전 기록도 없다. 단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것이 전부로, 일본 축구 암흑기에 고군분투했던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전성기에는 우리나라의 차범근처럼 독일에서 활약하느라 일본 국가대표에 한동안 소집되지 않았던 점도 크다.[6]
3. 선수 은퇴 이후
1993년 J리그 출범 이후 친정팀인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의 사장 겸 감독으로 부임했고, 1999년 요코하마 FC의 창단을 도와 요코하마 FC의 구단주가 되었다. 그리고 과거 쾰른 시절 동료였던 피에르 리트바르스키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2012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 2014년 아시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2017년 나카타 히토시 감독이 경질되었을 때 요코하마 FC의 임시 감독을 맡아 1경기 지휘했다가 정식 감독 선임 이후 다시 구단주로 복귀했다.4. 기록
4.1. 대회 기록
- 후루카와 전기 (1970~1977, 1986~1987)
- 일본 사커 리그: 1976
- 천황배 JFA 전일본 축구 선수권대회: 1976
- 일본 슈퍼컵: 1977
-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986
4.2. 개인 수상
-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XI: 1976, 1986-87
-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 2012
- 아시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4
[1]
1977년 진출로, 한국 최초의 유럽 리그(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보다 2년 빠른 기록이다.
아시아로 범위를 넓히면 1912년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한
필리핀 출신의
파울리노 알칸타라가 유럽 리그에서 활동한 최초의 아시아인 축구 선수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스페인 국적으로 오랫동안 생활했기 때문에 순수 아시아 선수인지는 갑론을박이 있다.
[2]
현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의 전신.
[3]
1차전은 3:3 무승부. 2차전은 0:1로 패해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노팅엄은 이 대회 우승했다.
[4]
브레멘 시절에도 1년차 때는 오른쪽 풀백으로 활동했지만 2년차 때부터는 FW부터 DF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다고 한다. 이 당시
차범근의 소속팀(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과 경기할 때는 차범근을, 바이에른 뮌헨과 경기할 때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를 전담 마크하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
[5]
복귀 후 소속팀을 1986년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6]
동시기 같은 조건에서 활약했던 차범근이 독일 진출 전,
1972년 AFC 아시안컵 준우승 멤버로 활약했고, 6년 뒤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것에 비하면 굉장히 초라한 기록이다. 70년대 아시아에서 꽤 힘을 썼던 대한민국과 그렇지 못했던 일본과의 전력 차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