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교통 테크노크라트.2. 생애
개인 신상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인물인데, 인민들 속에서 64권에 수록된 그의 수기에 따르면 다름아닌 빨치산 오중화의 아들로 만경대혁명학원, 해양대학을 거쳐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진학하였다. 즉 오극렬의 사촌이다. 그러다가 1967년 11월, 김일성이 그를 직접 만나 해운 부문 간부가 부족하니 군인을 그만두고 해운 부문에서 일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면서 신설된 내각 륙해운상에 임명되었다. 즉 북한의 초대 륙해운상인 것이다.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 1969년 3월, 김태근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1972년 10월 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륙해운상에서 해임, 오백룡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북한 자료에 따르면 이후 인민경제대학으로 가서 공부하였다. 이유는 의욕만 앞서고 실무 지식이 없어서 실수연발이었기 때문이라고(...)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고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면서 북한은 륙해운성 폐지를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교통체신위원회 해운처 국장으로 직위가 낮아졌으나 1982년 전임 륙해운부장 방철갑이 해임된 이후 신임 륙해운부장에 임명되었다. 1983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8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이후 륙해운성이 또 없어졌는지 교통위원회 해운총국장으로 다시 지위가 낮아졌으나 1987년 즈음에 해운부가 부활하면서 1988년, 다시 해운부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해운부장에 유임되었으며 1995년까지 재임하였다.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마지막 공식 활동은 1994년 8월 나진항 제1부두 비료중계장 완공식에 함경북도 책임비서 리근모, 함경북도 행정경제위원장 김충일과 함께 참석한 것이었다.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1995년 11월, 북한에서 신임 해운부장으로 김영일을 보도하면서 경질이 확인되었다. 이는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 이후 2번째의 장관 교체였다.[1]
이후 소식이 없다가 2006년 10월 26일, 정무원 해운부장의 직함으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1]
첫번째는 림업부장 김재률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