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25 08:27:27

오룡방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군인.

2. 생애

1925년 11월 22일에 유격대 5형제의 한명인 오중화의 아들로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났다. 1933년 4월부터 사립보문학당, 온성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졸업 후 1940년부터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일본군에 끌려갈 위기에 처하자 만주로 달아나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다시 농사를 짓다가 리 자위대장, 민청위원장 등으로 사업하였다. 항일 빨치산 가문이다보니까 1946년 9월, 간부를 양성하는 평양혁명자유자녀학원 1기로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중앙보안간부학교에 진학해서 공부하였다.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회령군관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정보가 떠돌아다니지만 90년대 이전의 불확실한 풍문이다.

1949년 인민군 소대장으로 임관하였으며 6.25 전쟁에 참전하여 낙동강까지 내려갔다. 전쟁 중 정찰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서울 전투, 낙동강 전투 등에서 싸웠다. 종전 후 소련군사대학 유학을 다녀왔다고 하며 인민군 군단사령부 부부장, 부장으로 일했으며 1958년 9월 민족보위성 부국장, 국장을 연이어 지냈다. 1959년 중앙위원회 군사부에서 일했다.

1963년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1966년 사단장을 거쳐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6년 6월 인민군 군관학교 교장으로 일하다가 다시 군단장으로 옮겼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78년 후방군 기지사령관으로 지내다가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및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직후 중앙위원회 위원에 승진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2월, 인민무력부 국장 겸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92년 남북군사공동위원회 북측 부위원장을 맡았다. 1993~1994년 시점에서 인민무력부 부총참모장 겸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승진하였다. 1995년 10월 6일, 모범적 군인으로 선정되어 김정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5년 7월, 김봉률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김광진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인민무력부가 인민무력성으로 개편되면서 인민무력성 부상에 유임되었다. 중국과 군사문제로 회담을 가지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가 2000년 4월 18일, 시리아 독립 54주년 기념 시리아 대사관 연회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2000년 6월 6일 4시에 74세를 일기로 급사하였다.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전후 인민군대의 책임적인 직책에서 오래동안 사업하면서 당의 주체적인 군사로선을 철저히 관철하며 인민군대를 정치군사적으로 강화발전시키기 위하여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쳤다. 그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당과 혁명에 끝없이 충실하였다"라고 칭송해주었다. 6월 7일, 김정일이 화환을 보내주며 애도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2022년 8월 25일자 조선중앙통신 기지사령관으로 "우리 혁명무력의 핵심골간을 키운 위대한 동지애의 품"란 기사를 통해 "혁명의 총대를 억세게 틀어쥐고 당과 혁명,조국과 인민을 보위하는 성스러운 복무의 길을 걸으면서 높은 군사적자질과 지휘능력을 지니고 당의 군사로선관철에 뚜렷한 생의 자욱을 남긴 오룡방동지"라고 칭송했다.

3.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