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58:08

오드 윈게이트

파일:영국 국기.svg 제2차 세계 대전 영국군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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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전시에는 임시 계급이었으나 이후 정식 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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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8><colcolor=#fff> 오드 찰스 윈게이트
Orde Charles Wingate
DSO & Two Bars
파일:Ordecharleswingate.jpg
출생 1903년 2월 26일
영국령 인도 아그라-오우드 연합주 나이니탈
(現 인도 공화국 우타라칸드 주 나이니탈)
사망 1944년 3월 24일 (향년 41세)
영국령 인도 마니푸르 주 비슈누푸르 인근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군인
복무 영국군 (1921~1944)
최종 계급 소장
경력 기데온 부대
친디트 부대
참전 팔레스타인 독립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2.2. 제2차 세계 대전
2.2.1. 동아프리카 전역2.2.2. 버마 전선
2.3. 윈게이트의 기행
3. 평가4. 기타

[clearfix]

1. 개요

오드 윈게이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친디트와 같은 특수임무부대를 창설하여 마니푸르- 버마 전역에서 다양한 특수전 임무를 수행했던 지휘관이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903년 2월 26일, 윈게이트는 영국령 인도의 나이니탈에서 군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조지 윈게이트 대령은 윈게이트가 태어나고 2년 후에 전역했다.

윈게이트는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는데, 12살이 되기까지 주로 그의 형제와 함께 지냈다. 조지 윈게이트는 그의 7명의 자녀를 기독교식으로 가르쳤다.

1916년, 윈게이트 가족은 고덜밍(Godalming)으로 이사했고, 차터하우스(Charterhouse)[1]의 통학생으로 다녔다. 그러나 그는 학교 수업보다는 가정 교육 위주로 독립적인 생각과 자립성을 길렀다.

4년 후, 그는 차터하우스를 나왔고, 1921년에 울리치 왕립군사학교(Royal Millitary Academy, Woolwich)의 왕립 포병 장교 교육 학교에 합격했다.

1923년에, 윈게이트는 왕립 포병 장교 임관을 받았고 5th Medium Brigade에 발령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승마나 여우 사냥 등에 큰 흥미를 가졌는데, 이때 그가 강을 건너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를 잘 찾아내는 등의 모습을 보이자, 그에게 "수달"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1925년 8월 29일, 그는 중위로 진급했다. 그가 승마에 소질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1926년, 그는 마술(馬術)군사학교에 발령받아 뛰어난 재능을 선보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병 장교들은 그를 싫어했는데, 윈게이트가 사사건건 그들의 지휘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윈게이트의 친척 레지널드 윈게이트(Reginald Wingate) 경은 군인 출신의 수단 총독이었다. 그는 1899년부터 1916년까지 수단의 총독을 지낸 후 1917년에서 1919년까지 이집트의 고등판무관을 맡았다. 윈게이트는 레지널드를 보고 중동과 아라비아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 6월, 윈게이트는 사촌 렉스의 응원 속에 수단 방어 부대(SDF)에 파견 신청서를 내고 하르툼으로 향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짐을 택배로 보낸 다음, 자신은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에서부터 독일에서 시작해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제노바로 향했다. 그리고 제노바에서 배를 타고 카이로를 거쳐 하르툼에 도착했다. 1928년 4월, 그의 파견 신청서가 통과되었고, 윈게이트는 동아랍군단에 발령받았다.

1930년 3월, 윈게이트는 빔바쉬[2]라고 불리는 지역 계급을 얻고, 300명의 군사를 통솔하게 되었다. 그는 기존의 정규 순찰을 매복식으로 바꾸어버렸는데, 그는 그의 대원들과 수풀 속에 숨어 있을 때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 그는 고대 유물들을 찾아서 왕립지리학회 등의 도움을 받아 리비아 사막에서 탐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1933년 4월 2일, 그는 수단에서의 군생활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와서 포병대의 기계화에 맞추어 재교육을 받았다. 1935년 1월 24일, 윈게이트는 이집트에서 만난 후 2년간 교제하던 로나 패터슨(Lorna Patterson)과 결혼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2.2.1. 동아프리카 전역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윈게이트는 본토의 대공포 지휘관으로 있었다. 그런데, 그와 친분이 있던 극동사령부 최고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이 에티오피아 공격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그를 수단으로 불러들였다.

윈게이트는 수단의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플라트(William Platt)의 지휘 아래 특수작전 부대인 기데온 부대를 창설했고, 그들을 지휘하기 위해 임시 중령 계급을 받았다. 그는 특수야간분대(SNS)의 베테랑을 많이 영입했고 1941년 2월에 작전을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 인구의 7%가량을 학살했고, 그 때문에 많은 에티오피아인들이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증오로 기데온 부대의 작전을 기꺼이 지원해주었다. 지역 저항군의 도움을 받으며, 기데온 부대는 이탈리아군의 보급선 차단 등을 진행했고, 결과적으로 1,700여명의 부대원으로 20,000여명의 이탈리아군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1941년 4월, 윈게이트는 이때의 전공으로 수훈 보고서에 이름이 올랐고, 그해 12월에 그의 첫 DSO를 수여받았다.

1941년 6월 4일, 동아프리카 전역이 끝나면서 윈게이트는 기데온 부대 지휘관직을 내려놓고 소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작전을 수행하면서 그는 사령관에게 기데온 부대의 동료들에게도 훈장을 줄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도 건내지 못한 채 에티오피아로 파견되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말라리아까지 걸려버렸다. 그는 군의관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할까봐 지역의사를 불러 개인적으로 약을 처방받았다. 하지만 그 약은 부작용으로 우울증이 올 수 있었고, 가뜩이나 이전의 일들로 잔뜩 스트레스를 받았던 윈게이트는 결국 자살시도까지 하게 되었다. 근처에 있던 다른 장교가 그를 구해서 자살 시도는 실패했고, 그는 재활을 위해 영국으로 호송되었다.

한편, 윈게이트의 지지자들은 잘 편집된 윈게이트의 보고서를 윈스턴 처칠에게 직통으로 전달했고, 1942년 2월 27일, 윈게이트는 극동의 랑군으로 파견되었다.

2.2.2. 버마 전선

1942년 3월 극동에서, 웨이벌 장군은 윈게이트를 다시 대령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할 게릴라 부대를 창설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일본군의 공세를 당해내기도 벅찼던 상황이라 윈게이트는 장거리 침투조를 구상하기 위해 인도로 갔다.

웨이벌은 윈게이트의 이론에 감명을 받았었고, 장거리 침투부대를 편성하도록 그에게 인도제77보병여단을 맡겼다. 윈게이트는 버마의 전설 속 사자, 친테[3]에서 이름을 따서 그 부대를 친디트라고 불렀다.

1942년 8월, 윈게이트는 다나(Dhana)에 훈련소를 세우고 친디트 부대를 훈련시켰다. 그는 그의 부대원들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기에 인도 정글 속에서 야영을 보내게 했으나 결과는 부대원의 70%가 심각한 질병에 걸리는 것으로 끝났다. 결국 윈게이트는 다른 부대에서 인원을 새로 차출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친디트 부대는 1943년에 야전군과 협력하여 첫 작전을 시행할 예정이었으나, 버마로의 공세작전이 취소되면서 원래 예정대로 작전을 시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윈게이트는 웨이벌에게 자신의 부대만이라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웨이블은 롱클로스 작전(Operation Longcloth)를 진행시켰고, 1943년 2월 12일, 윈게이트와 그의 친디트 부대는 임팔로 향했다. 그들은 버마로 가는 철로 하나를 고장냈고, 계속해서 침투하여 이라와디 강을 건넜다. 하지만, 그곳의 환경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보와 너무나도 달랐다. 지역은 건조했고 사람이 살기에 불편했으며, 십자형의 도로 때문에 일본군이 친디트 부대의 보급을 쉽게 빼앗을 수 있었다. 결국 친디트 부대는 곧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3월 22일, 극동사령부는 윈게이트에게 인도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윈게이트는 무사히 철수할 방법을 고민했지만 어떤 계획을 짜든 일본군의 맹렬한 추격에 큰 피해를 입을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은 일본군의 예상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왔던 길을 정확히 되돌아가기로 했다. 친디트 부대는 이라와디 강까지 돌아오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일본군이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고 적극적인 강 순찰을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윈게이트는 부대를 작게 나누어 일본군의 추격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고, 각자 다양한 루트를 통해 인도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력의 1/3을 잃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첫번째 장거리 침투 임무가 이렇게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자, 많은 장교들은 친디트 부대의 존재 의의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오히려 일본군에게 버마/인도 전선이 사람이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은 친디트 부대의 이런 침투 작전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4] 그래서 친디트 부대의 이런 작전은 '일본군을 정글에서도 이길 수 있다.'라는 내용의 프로파간다로 활용되었다.

한편, 윈게이트는 영국군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5]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 역시 윈게이트의 지지자들에 의해 윈스턴 처칠에게 직통으로 전달되었고, 처칠은 윈게이트를 런던으로 호출했다. 윈게이트가 도착하자, 처칠은 윈게이트와 그의 아내를 퀘벡 회담에 데려가기로 결심했다. 그곳에서 윈게이트는 장거리 침투 작전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공군, 라디오, 그리고 최근에 발달된 기술들은 병력이 적국 점령지 깊숙한 곳에 침투해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내용을 들은 많은 지휘관들이 이 내용에 감명받고 대규모의 장거리침투 작전을 승인했다. 그리고, 1943년 9월 18일, 윈게이트는 임시 준장인 중령에서 소장으로 진급했다.

퀘벡 회담이 끝나고 인도로 돌아오는 길에 윈게이트는 장티푸스에 걸리게 되는데, 카이로 호텔의 꽃병 안에 있는 물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의사들은 경악했고, 윈게이트는 회복을 위해 새로운 장거리 침투조의 훈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윈게이트가 인도로 돌아오자, 그에게 6개의 여단이 주어졌는데, 윈게이트는 이 여단들을 모두 하나의 친디트 부대처럼 만들어갔다. 여러 지휘관들이 차라리 그 여단들을 전선을 채우는데 쓰길 원했지만 윈게이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6]

그리고 마침내 윈게이트의 6개 여단을 모두 투입하는 2차 장거리 침투 작전이 계획되었다. 원래는 육군의 진격에 발맞추어 작전을 실행할 예정이었지만 이번에도 육군의 진격계획이 취소되었고, 윈게이트의 여단들을 전방으로 이송할 차량도 항공기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윈게이트의 침투 계획 역시 취소되었다. 인도로 돌아가 이 소식을 들은 윈게이트는 크게 실망했다. 그런데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제1공수코만도전투단의 지휘관인 필립 코크란(Philip Cochran) 대령이 윈게이트에게 다가와서는 윈게이트의 임무를 취소하지 않을 수 있다면서 경비행기와 C-47이 아니더라도 150개의 글라이더만으로 윈게이트의 침투작전을 충분히 지원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듣자 윈게이트의 눈이 커졌고, 결국 윈게이트는 어떻게든 버마로 가겠다고 결정했다. 목요일 계획(Operation Thursday)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번 침투 계획은 이전의 계획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번의 임무는 친디트 부대가 공세적 순찰과 차단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요새화된 기지를 버마에 건설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7]

착륙지점으로 "피카딜리", "브로드웨이", 그리고 "코링히"라고 불리는 세 지점이 선택되었다. 3월 5일 저녁, 윈게이트와 슬림 중장[8], 제임스 칼버트(James Calvert) 준장[9], 그리고 코크란 대령이 작전 지휘를 위해 인도의 공항으로 모였다. 제77여단은 "피카딜리"로 향할 예정이었는데, 여기서 사건이 발생한다. 윈게이트는 일본군에게 착륙 지점이 노출될 것을 우려하여 착륙지점을 정찰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코크란이 이걸 무시하고 "피카딜리"로 정찰을 보냈던 것이다. 윈게이트는 이것 때문에 착륙지점이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매복을 당할 것이라며 배신당했다고 격분했다. 그러고는 작전을 진행할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을 슬림한테 넘겼다.

슬림은 작전을 계속 진행할 것을 명령했고, 윈게이트는 그렇다면 제77여단은 일본군에게 노출되었을 "피카딜리"가 아니라 "코링히"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곳은 이라와디 강과 떨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고 파일럿들이 그곳의 지리에 익숙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제77여단은 "브로드웨이"에 착륙하기로 결정되었다.

최초의 착륙은 실패했다. 많은 글라이더가 도중에 추락했고, "브로드웨이"도 착륙에 적합한 지형이 아니었다. 하지만, 칼버트의 여단은 신속하게 착륙에 적합한 간이 비행장을 만들어냈고, 착륙에 성공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1개 여단을 제외한 모든 친디트 여단이 버마로 보내졌고, 일본군 전선의 후방에서 공중보급이 가능한 기지를 형성했다. 거기에다 때마침 일본군이 인도로의 공세를 진행하면서 일본군의 공세를 방해하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다.

1944년 3월 24일, 윈게이트는 버마에 있는 첸디트 기지를 시찰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두 명의 영국인 종군기자와 함께 비행기에 탑승했다. 파일럿은 비행기가 과적되었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행을 강행했다. 임팔에서 랄라가트(Lalaghat)로 가는 도중, 그를 태운 B-25 미첼 폭격기가 정글에 추락했고, 탑승자 전원이 숨졌다.

윈게이트를 포함한 열 구의 시신 중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시신은 없었고, 결국 그들 모두 가까운 공동묘지에 묻히게 된다. 10명의 사망자 중 5명이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1947년에 그들의 시신은 임팔로 이장되었고, 인도, 영국, 미국 세 개 정부의 합의와 유가족의 의견을 규합하여 다시 미국 버지니아 알링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2.3. 윈게이트의 기행

윈게이트는 일생동안 여러가지 기행을 행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던 것은 둘째치고[10], 그는 인도에서 강해져야 한다면서 생양파를 먹고 목욕 대신 자신의 몸에 솔질을 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텐트에서 벌거벗은 채로 손님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의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생양파와 마늘을 엮어서 목에 걸고 다니기도 했고, 어떤 날은 양파와 포도만 먹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샤워하다 말고 벌거벗은 채로 나와서 임무를 하달하기도 했었는데, 얼마나 자주 그랬으면 병사들이 그것에 익숙해졌을 정도였다.

3. 평가

자전거를 타고 유럽여행을 떠나는 등의 면모를 보면 윈게이트는 모험심이 굉장히 강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그 모험심 만큼이나 고집도 상당한 편이었는데, 고집만 있는게 아니라 성격도 괴팍했던 탓에 거의 항상 주변의 다른 장교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솔직히 윈게이트의 기행들을 보면 그 장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것도 아니다.

윈스턴 처칠의 주치의인 모란 남작(1st Baron Moran)은 그의 일기에 윈게이트가 경계선 성격장애 같다고 적어두었다.[11] 마찬가지로, 맥스 헤이스팅스(Max Hastings)는 퀘벡에서 윈게이트를 만나고, "처칠조차도 윈게이트가 고위 장교를 하기엔 너무 미쳐있었음을 깨달았다."라고 기록했다.[12]

심지어 1966년, 몽고메리 원수가 모세 다얀에게 윈게이트에 대해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고 그의 최고 업적은 1944년에 비행기 사고로 죽은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인맥 덕에 수차례 도움을 받았던 것을 보면, 생각보다 인간관계가 좋았거나 적어도 인복은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장거리 침투 게릴라 작전에 대해서 주변인들의 평가도 꽤나 갈리는 편이다.

그의 상관이었던 윌리엄 슬림 원수는 잘 훈련된 병사들을 전선에서 빼돌리는 쓸모없는 짓이었다고 주장했고,[13] 친디트 대원 중 한명이었던 로버트 톰슨 경(Sir Robert Thompson)은 그의 자서전에서, 윈게이트야말로 20세기 최고의 인물임에 분명하다고 주장했다.[14]

역사가 레이몬드 캘러핸(Raymond Callahan)은 윈게이트의 구상에 몇가지 결점이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일본군이 서방 군대와 동일한 보급체계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윈게이트가 서방 군대의 보급체계를 상정하고 교란계획을 수립했기 때문에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고 비판했다.[15] 반면, 당시 버마 방면 일본군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는 윈게이트의 목요일 작전 때문에 코히마 공세에 나서야 했던 제53사단 전체와 제15사단 일부가 발목이 잡혔다는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4. 기타

1976년, BBC에서 <Orde Wingate>라는 이름의 3부작 드라마를 방영했었다.

이지테크 사의 작품인 세계 정복자 3 세계 정복자 4에서 등장한다.[16]


[1] 고덜밍 지역에 있는 공립학교 [2] 소령에 해당한다. [3] 버마 사원에 세워져있는 수호신 동상이다. [4] 실제로 일본군들도 친디트 부대가 그들의 1943년 상반기 계획을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인정했다.(Rooney, David (2000) 1994. Wingate and the Chindits. London: Cassell Military Paperbacks. ISBN 0-304-35452-X. p.99) [5] 윈게이트는 이 보고서에 영국군이 툭하면 의사를 불러대는 통에 너무 약골이 되었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6] 사실 윈게이트는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14군 전체를 장거리 침투 군으로 만들려고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장거리 침투조를 위한 보급용 비행장을 방어할 부대가 부족해진다는 등의 이유로 기각되었다. [7] 이 작전은 훗날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활용한다. [8] 당시 제14군 사령관 [9] 당시 제77보병여단(친디트 부대) 지휘관 [10] 수염을 이렇게 덥수룩하게 기르는 것은 당시 영국 매너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특히나 장교 사회는 규율을 중시하므로 매너를 강조하는 태도가 강하면 강했지 약할 리가 없었다. [11] Wilson, Charles McMoran (1966). Churchill: Taken from the Diaries of Lord Moran. Boston: Houghton Mifflin. p.115 [12] Hastings, Max (2009). Finest Years: Churchill as Warlord, 1940–45. London: HarperPress. p. 388. ISBN 978-0-00-726367-7. p.388 [13] Slim, William (1956). Defeat into Victory. London: Cassell. OCLC 1296031. pp. 546–549. [14] Thompson, Sir Robert (1989). Make for the Hills: The Autobiography of the world's leading Counter Insurgency Expert. Pen and Sword. p. 76. ISBN 978-0-85052-761-2. p.76 [15] Callahan, Raymond E. "The Strange Case of the Prime Minister and the Fighting Prophet". The Churchill Centre.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9 February 2014. [16] 종종 '원갓'이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 부분은 이지테크 사의 고질적인 오번역이다. 발터 모델같은 경우에는 두 시리즈 모두에서 브라우히치로 잘못 번역되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한국 유저에게 번역 자문을 요청해서 이런 오번역을 수정하려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