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1 14:15:02

영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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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해석3. 관련된 니체의 주요 어록4. 게오르크 짐멜(1858-1918)의 영원회귀 반박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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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니체가 주장한 이론. '영원회귀'(永遠回歸, Ewige Wiederkunft). '영겁회귀'라고도 부른다. 더 정확하게는 'The Eternal Recurrence of the Same'. 즉, 동일한 것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것.

니체에 따르면, 영원회귀를 통해 자신의 과제와 사명을 알게 되는데, 이 과제와 사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여라는 것이 아모르 파티가 된다.

2. 해석

니체는 자신의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에서 '영원회귀'가 자신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본 개념' 또는 '기본 아이디어'라고 주장했다. 즉, 니체는 '영원회귀'야말로 그의 가장 중요한 생각이라고 스스로 말한 것이지만, 이를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놓지는 않았다. 문맥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일련의 순환을 통해 동일한 순서로 영원히 반복된다"는 아이디어이지만, 정작 니체의 텍스트만으로는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해석하기란 어렵다. 니체의 책에서 영원회귀에 대한 표현은 '가설적'이고, '극도로 상징적이고 은유적'이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니체의 문제 의식을 따라가보면, 니체의 의도가 적어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을 생각해냈을 당시, 에너지 보존 법칙을 공부하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니체는 이 공부를 통해서 '한정된 공간'의 에너지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결국 동일한 순서를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이 세상이 일정한 크기의 힘과 일정한 수의 힘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존재의 거대한 주사위놀이 속에서 계산 가능한 수의 조합들을 계속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다. 무한의 시간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조합이 빠짐없이 한 번 씩은 나타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무한히 여러 차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조합'과 다음 번에 그것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회귀)' 사이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조합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고, 또 그 각각의 조합마다 전체 조합들이 일어나는 순서에 있어서 똑같은 조건인 만큼, 절대적으로 동일한 순서의 순환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유고』 中
그러나 이것은 "온갖 사고방식들 중에서도 가장 세계 부정적인 사고방식" [1]이 아닌가?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버텨낼 수 있는가? 모든 가치가 반대되는 가치로 변하고 그것이 다시 돌아온다면, 모든 변화가 그 변화 자체로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국 저 허무주의라는 심연에 빠져 끝없는 고통 속에서 헤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대립되는 가치는 사실 없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와 도덕에서 말하는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가치들은 모두 '거짓말'이 된다.[2] 그런데 니체에 의하면, 이분법적 가치들은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해서 없애버려서는 안 된다.[3] 그러므로 문제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거짓말을 어떤 목적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4] 어떤 목적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삶을 위한 목적이어야 한다. 즉, 실존의 필요에 의한 목적에서, 우리는 기존의 이분법적 가치를 파괴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 있게 만드는 새로운 이분법적 가치를 끊임없이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5] [6] [7]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삶의 필요에 의해 자신의 과제와 사명을 계속해서 찾아나서는 일종의 놀이이며 구경거리다.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더라도 그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과제와 사명을 찾는 놀이 말이다. 그러한 '놀이'를 즐길 때 그 사람의 삶은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 된다. 이로써 하나의 놀이가 된 삶 자체가 성스러운 것으로서 삶을 미화시키고 삶을 정당화하며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8]

종합하자면,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일 때에는 두가지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영원회귀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져 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온갖 사고방식들 중에서도 가장 세계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결론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영원회귀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조차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가치를 찾고 그 가치에 따르는 모든 것들을 긍정하겠다는 다짐의 결론, 즉 "도달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으로써의 결론이다. 이와 같은 두 결론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그 가혹하고도 잔인한 영원회귀의 사상을 받아들일 때, 영원회귀의 사상을 견뎌낼 수 없는 사람(허무주의자)은 몰락하여 사라질 것이고, 영원회귀의 사상을 견딜 수 있는 사람(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가는 사람)은 더욱 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시험과 같아서 그 시험을 치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건강의 관점'에서 힘의 서열이 생겨나도록 자극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삶의 심리에 있어서) 그 시험에 통과하는 자는 스스로를 '명령하는 자'로, 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자는 스스로를 '복종하는 자'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그들 각각은 각각의 위치에서 스스로에 대해 만족해 할 것이다. 사회의 허무주의는 이런 식으로 치료할 수 있고, 치료해야 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9] [10]
나의 교의가 가르치는 것. 다시 살기를 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너의 의무다. 어떤 경우라도 너는 다시 살 것이다! 노력에 의해 가장 고양된 감정을 얻은 자는, 노력하게 하라. 휴식에 의해 가장 고양된 감정을 얻은 자는, 휴식하게 하라. 동화되고, 따르고, 복종하는 것에 의해 가장 고양된 감정을 얻은 자는, 복종하게 하라. 단지 그 자가 자기 자신에게 가장 고양된 감정을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식하고 어떤 수단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것은 영원의 문제이다!
니체, 《유고 (1881년 봄-1882년 여름)》[11]
최대의 중량 ー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ㅡ 나무들 사이의 이 거미와 달빛, 그리고 이 순간과 바로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거듭해서 뒤집혀 세워지고 ㅡ 티끌 중의 티끌인 너도 모래시계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다! ㅡ 그대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그렇게 말하는 악령에게 이를 갈며 저주를 퍼붓지 않겠는가? 아니면 그대는 악령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엄청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너는 신이로다. 나는 이보다 더 신성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노라!" 그러한 생각이 그대를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지금의 그대를 변화시킬 것이며, 아마도 분쇄시킬 것이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나가야만 하는가?
니체, 《즐거운 학문》 341절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니체는 모든 사람이 창조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영원회귀의 사상을 견디고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개인주의로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바로 이 개인의 창조적인 명령으로써, 나머지 기계부품처럼 복종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이끌어 나가야 된다고 주장한 것이 니체였다. 그리고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다. 니체가 평등주의를 비판한 이유도, 평등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할 권리를 강요함으로써, 극소수의 창조적인 강자마저 평범하도록 몰락시켰기 때문에 비판한 것이지, 그것이 약자도 개인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12] 즉, 안락과 평온만을 원하기 때문에 창조와 모험을 멀리하고 남들과 똑같아지기를 추구하는 삶, 곧 기존 도덕과 종교에 복종하는 삶을 사는데 만족하는 평범한 다수의 문제에 대해서는 방관할 것이라는 점에서 니체의 사상은 권위적이고 계급주의적인 모습이 보이며, 이러한 예술가적 계급주의를 '정치적'인 문제에 단순히 적용시킨다면 독재를 충분히 미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유의해야만 하는 것이다.[13]

3. 관련된 니체의 주요 어록

이제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내력을 이야기하겠다. 이 책의 근본 사상인 영원회귀 사유라는 그 도달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은 ㅡ 1881년 8월의 것이다 : 그것은 "인간과 시간의 6천 피트 저편"이라고 서명된 채 종이 한 장에 휘갈겨졌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중에서
사실 나는 괴테가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모태가 되는 주신제와 같은 것을 그리스적 영혼의 가능성들로부터 원칙적으로 배제해버렸으리라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괴테는 그리스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적 비밀제의에서야,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심리학에서야 비로소 그리스적 본능의 근본적인 사실, 즉 '생에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은 이런 비밀제의에 의해 무엇을 보장했는가? 영원한 삶, 삶의 영원회귀였다. 과거 속에서 약속되고 신성시된 미래였다. 죽음과 변화를 넘어서 있는 삶에 대한 의기양양한 긍정이었다. 그리고 생식과 성의 신비를 통한 총제적 생명의 존속으로서의 진정한 삶이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인에게 성적 상징은 경외할 만한 상징 자체였고, 모든 고대적 경건성에 내재한 심오한 의미였다. 생식ㆍ수태ㆍ출산의 행위에 속하는 세부적인 하나하나의 일이 최고의 엄숙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비밀제의의 가르침에서는 고통이 신성한 것으로 선포되고 있다. '산모의 통증'은 고통 일반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 ㅡ 모든 생성과 성장, 미래를 보증하는 모든 것이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창조의 기쁨이 존재하려면, 삶에의 의지가 자신을 영원히 긍정할 수 있으려면, '산모의 고통'도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을 디오니소스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그리스적 상징, 디오니소스 축제의 상징보다 더 고귀한 상징을 알지 못한다. 그것에서는 삶의 가장 깊은 본능, 곧 삶의 미래와 삶의 영원성을 향하는 본능이 종교적으로 체험되고 있다. 삶으로 향하는 길 자체가, 곧 생식이 신성한 길로 체험되고 있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14]
나는 오르고 또 올랐다. 오르면서 꿈도 꾸었고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극심한 고통에 지쳐 있는 차에 한층 고약한 꿈 때문에 놀라 잠에서 깨는 병자 같았다. 그런데 내 안에는 내가 용기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 모든 낙담을 죽여왔던 바로 그것이지. 이 용기가 마침내 내게 걸음을 멈추고 말을 하라고 명했다. "난쟁이[15]여! 너! 아니면 나다!"
그러니까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는. 모든 공격 속에는 진군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장 용기 있는 짐승이다. 바로 그 용기로 인간은 온갖 짐승을 넘어섰다. 진군의 나팔 소리를 울리면서 인간은 온갖 고통마저 극복했다. 인간의 고통이야말로 가장 깊은 고통인데도. 용기는 심연에서 느끼는 현기증도 죽인다. 그런데 인간이 서 있는 곳치고 심연 아닌 곳이 있던가! 본다는 것 자체가 심연을 보는 것이 아닌가?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그것은 동정도 죽인다. 그런데 동정은 가장 깊은 심연이다. 삶을 깊이 보는 것만큼 인간은 고통도 깊이 본다. 하지만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는. 이 용기는 죽음마저도 죽인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라고 말하기 때문이다.[16] 이런 말에서는 진군의 나팔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진다. 귀 있는 자, 들을 지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7]
내가 "위버멘쉬"라는 말을 길에서 습득한 곳, 인간은 극복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습득한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것을 습득한 곳, 새로운 아침놀에 이르는 길로서, 자신의 정오와 저녁 덕택에 스스로를 찬양한다는 것을 습득한 곳도 그곳이었다. 위대한 정오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습득한 곳, 그 외에도 내가 두 번째 자줏빛 저녁놀처럼 사람들 위에 내걸었던 것을 습득한 곳도 그곳이었다. 진정 나는 새로운 밤과 더불어 새로운 별도 저들이 보게끔 해 주었다. 나는 웃음을 구름과 낮과 밤 위에 오색찬란한 장막을 치듯 펼쳐놓았다. 나는 저들에게 내가 심혈을 기울였던 것 전부를 가르쳤다. 인간에게서 파편이고 수수께끼이자 가공할 우연인 것을 하나로 압축하고 집약하는 것을. 시인이자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자 우연의 구원자로서 나는 저들에게 미래를 창조할 것을,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것 전부를 창조를 통해 구원할 것을 가르쳤다. 인간에게서 과거를 구원하고 모든 "그랬었지!"를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기를 나는 원할 것이다!"라는 의지의 외침에 이르기까지 변모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구원이라고 나는 저들에게 알려주었고, 그것만을 구원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
고통 또한 기쁨이고, 저주 또한 축복이며, 밤 또한 태양이니. 그대들은 꺼져버리든지 아니면 배우든지 하라. 현자 또한 바보이니. 그대들은 일찍이 하나의 기쁨에 대해 '그렇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오, 내 벗들이여, 그랬다면 그대들은 또한 모든 비애에 대해서도 '그렇다'라고 말한 셈이다.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실로 묶여 있으며, 사랑에 빠져 있으니. 그대들이 일찍이 '한 번, 또 한 번'을 원한 적이 있는가? 그대들이 일찍이 "네가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원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며,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실로 묶여 있고, 모든 것이 사랑에 빠져 있다.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다. 그대 영원한 자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그리고 항상 사랑하라. 그리고 비애에 대고 "사라져라. 하지만 때가 되면 돌아오라!"라고 말하라. 모든 기쁨은 영원을 원하기 때문이다!

기쁨 일체는 모든 것이 영원하기를 원하고, 꿀을 원하고 효모를 원하며, 취해 있는 자정을 원하고, 무덤과 무덤의 눈물 어린 위안과 황금빛 저녁놀을 원한다. 기쁨이 무엇인들 원하지 않겠는가! 기쁨은 모든 비애보다 더 목말라 있고, 더 진심이며, 더 굶주려 있고, 더 섬뜩하고, 더 은밀하다. 기쁨은 자기 자신을 원하고, 자기 자신을 물고 있으며, 그 속에서는 둥근 고리의 의지가 애를 쓰고 있다. 기쁨은 사랑을 원하고, 미움을 원한다. 기쁨은 넘치도록 풍요로워 선물을 하고, 던져버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애걸하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감사한다. 기쁨은 기꺼이 미움받으려 한다. 기쁨은 비애를, 지옥을, 미움을, 비방을, 불구를, 세계를 갈구할 정도로 풍요롭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오, 그대들은 이 세계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 좀 더 높은 인간들이여! 기쁨은, 그 억제하기 어려운 복된 기쁨은 그대들을 동경한다. 그대들의 비애를 동경한다. 그대 실패한 자들이여! 모든 영원한 기쁨은 실패자들을 동경한다. 모든 기쁨은 자기 자신을 원하며, 그 때문에 심장의 고통 또한 원하기 때문이다! 오, 행복이여, 오, 고통이여! 오, 부서져라, 심장이여! 그대 좀 더 높은 인간들이여, 배우도록 하라. 기쁨이 영원을 원한다는 것을. 기쁨은 모든 것의 영원을 원한다. 깊고도 깊은 영원을!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9]
"오, 사람아! 너의 삶 전체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워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또 끝날 것이다. ㅡ 네가 생겨난 모든 조건들이 세계의 순환 속에서 서로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사이의 위대한 순간의 시간, 그 다음에 너는 모든 고통과 모든 쾌감과 모든 친구와 적과 모든 희망과 모든 오류와 모든 풀줄기와 모든 태양빛을 다시 되찾을 것이다. 모든 사물의 연관 전체를 되찾을 것이다. 네가 하나의 낟알로 들어 있는 이 고리는 항상 다시 빛난다. 그리고 인간 존재 전체의 모든 고리 속에는 항상 어떤 순간이 있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단 한 사람에게, 그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결국 모든 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생각, 즉 모든 것의 영원회귀라는 사상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ㅡ 인류에게 이때는 매번 정오의 순간이 된다.
니체전집 12 /KGW V 2, 11[148], p.498
최대의 중량 ー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ㅡ 나무들 사이의 이 거미와 달빛, 그리고 이 순간과 바로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거듭해서 뒤집혀 세워지고 ㅡ 티끌 중의 티끌인 너도 모래시계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다! ㅡ 그대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그렇게 말하는 악령에게 이를 갈며 저주를 퍼붓지 않겠는가? 아니면 그대는 악령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엄청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너는 신이로다. 나는 이보다 더 신성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노라!" 그러한 생각이 그대를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지금의 그대를 변화시킬 것이며, 아마도 분쇄시킬 것이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나가야만 하는가?
니체, 《즐거운 학문》 341절
나처럼 어떤 수수께끼 같은 갈망을 가지고 염세주의를 그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사유하면서, 염세주의를 마침내 금세기에 쇼펜하우어 철학의 형태로 나타났던, 반쯤은 그리스도교적이고 반쯤은 독일적인 편협함과 순진함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랜 동안 노력해왔던 사람, 아시아적이거나 초아시아적인 눈으로 온갖 사고방식들 중에서도 가장 세계 부정적인 사고방식의 정체를 ㅡ 부처나 쇼펜하우어처럼 도덕적인 속박이나 망상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선악의 저편에서 ㅡ 꿰뚫어보고 그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내려다본 사람은 아마도 바로 이로 말미암아 전혀 의도치 않게 정반대의 이상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20] 그러한 이상이란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이 넘치며 극한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이다. 그러한 인간은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그것과 화해하는 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다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인생의 연극과 구경거리 전체 뿐 아니라 바로 이러한 구경거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또한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그야말로 영원에 걸쳐서 물릴 줄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da capo)'라고 부르짖는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거듭해서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고 필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21] 뭐라고? 이것이야말로 악순환의 신(circulus vitiosus deus[22])이 아닌가?
『선악의 저편』 56절.[23]

4. 게오르크 짐멜(1858-1918)의 영원회귀 반박

이 반박은 기술적, 혹은 자연과학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크기가 같은 세개의 바퀴가 있고, 같은 축의 둘레를 회전한다고 생각해보자. 세 바퀴의 일정한 부분에 점을 찍어서 표시를 해 두고, 바퀴를 돌린다. 이 때, 두 번째 바퀴는 첫 번째 바퀴보다 두 배 빨리 회전시키고 세번째 바퀴는 1/π의 속도로 회전시킨다. 이 바퀴가 영원히 회전하면서 마찰이 없다고 가정하면, 이 세 점들은 언제 처음과 같은 위치에 올까? π가 만약 3이라면 첫번째 바퀴가 세번 회전하는 순간 같은 위치에 올 것이다. 그러나 π는 무리수이므로 이 바퀴는 영원히 같은 위치로 돌아올 수 없다. 즉, '수학적으로 결코 되풀이 될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세계의 상태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무한한 시간 속에 있는 세 바퀴는, 원래 상태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즉 무한한 시간이 흘러도 반복되지 않는 것은 수학적으로 가능하다. 이는 푸앙카레의 순환정리(Poincare recurrence theorem)를 통해서 증명된다.

다만, 이 반박은 사실 니체의 의도와는 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니체는 영원회귀를 사실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었을 때 삶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관심이 있었던 것이므로, 영원회귀가 사실인가 아닌가는 니체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5. 여담

  • 밀란 쿤데라는 영원회귀의 개념을 가지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썼다. 소설 시작부터 니체의 영원회귀를 언급하며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는 영원한 회귀하는 역사, 사상 등을 무거움으로 설정하고, 단 한 번만 사는 인생을 가벼움으로 설정하여 끝없이 삶과 역사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비교한다. 형식은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소설이지만, 스토리 중간 중간 계속해서 영원회귀를 언급하며 니체에 대한 쿤데라 자신의 해석을 설파한다고 볼 수 있다.


[1] 『선악의 저편』 56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134) [2] 우리가 처음부터 우리의 무지 상태를 존속하게 하려고 애썼던 것은 상상도 못할 자유, 무분별, 경솔함, 왕성함, 삶의 명랑함을 즐기기 위해서, 즉 삶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이제까지 무지라는 이 견고한 지반 위에서 비로소 학문이 자라날 수 있었고, 앎에의 의지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지, 몽매함, 허위에의 의지를 기반으로 해서 자라날 수 있었다. 앎은 무지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무지가 세련된 것이었다!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언어는 조야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단지 정도 차이나 여러 미묘한 단계가 존재할 뿐인데도 계속해서 앎과 무지의 대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살과 피'가 되어버린 도덕적 위선이 우리들 깨어 있는 자들의 말까지도 왜곡할 수 있다. 여기저기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있으며, 최상의 학문이야말로 이렇게 단순화되고 철저하게 인위적이고 적당히 꾸며지고 적당히 왜곡된 세계에 우리를 붙잡아 두려고 한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최상의 학문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류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학문도 하나의 살아 있는 것으로서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ㅡ 《선악의 저편》 24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74) [3] 어떤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거부할 필요는 없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우리의 새로운 언어는 아주 이상하게 들리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판단이 얼마나 생명을 촉진하고 보존하며, 얼마나 종을 보존할 뿐 아니라 육성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즉 가장 잘못된 판단들이 우리에게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판단들이며, 논리적 허구를 용인하고 절대자ㆍ자기 동일자라는 전적으로 고안된 세계를 기준으로 하여 현실을 평가하면서 수에 의해서 세계를 지속적으로 왜곡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또한 잘못된 판단을 포기하는 것은 생을 포기하고 생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거짓을 삶의 한 조건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 통상적인 가치 감정에 위험한 방식으로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저항을 감행하는 철학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선악의 저편에 있다.ㅡ 《선악의 저편》 4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8~29) [4]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는 '신성한'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교적 수단에 반대하는 이유다. 그리스도교에는 나쁜 목적만 있다. 에 해독을 끼치고 을 비방하고 부정하려는 것, 육체를 경멸하려는 것, 죄라는 개념을 가지고 인간의 가치를 폄하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모독하게 하려는 것뿐이다. ⋯⋯ 따라서 그 수단도 나쁘지 않을 수 없다. ㅡ 그리스도교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느낌을 받으면서 나는 마누의 법전을 읽는다.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이고 탁월한 책이며, 그것을 성경과 동렬에 놓고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에 대한 죄가 될 정도의 책이다. ㅡ 《안티크리스트》 56절.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3, p.139~140) [5] 내가 심리학적 문제 일반에 관한 감식력을 타고난데다 어느 정도의 역사학적ㆍ문헌학적인 훈련을 쌓게 되면서 나의 문제는 다른 문제로 변형되었다. 즉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선과 악이란 가치판단을 고안해냈는가? 그리고 그러한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떠한 가치를 갖고 있는가? 그것들은 이제까지 인간의 번영을 저지해왔는가 아니면 촉진해왔는가? 그러한 가치판단들은 삶의 위기와 빈곤 그리고 퇴화의 징후인가? 아니면 반대로 그것들에는 삶의 충만함과 힘, 삶의 의지와 용기, 삶에 대한 자신감과 미래가 나타나 있는가? ㅡ 『도덕의 계보』 서문 3절.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1, p.16) [6] 이제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라는 칸트의 물음을 '그러한 판단에 대한 믿음이 왜 필요한가?'라는 물음으로 바꿔야 할 때가 왔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판단이 거짓된 판단일 수 있지만 인간이라는 종의 유지를 위해서는 그러한 판단이 진리로 믿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ㅡ 《선악의 저편》 11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47) [7] 어떤 것은 극도로 해롭고 위험한 것일지라도 진리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완전한 인식으로 인해서 파멸한다는 것 자체가 삶의 근본성질에 속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신의 강함은 얼마나 '진리'를 견뎌낼 수 있는가에 따라서 측정될 수 있으며,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그가 어느 정도까지 진리를 희석시키고 은폐하며 감미롭게 만들며 둔화시키고 왜곡시킬 필요가 있느냐에 따라서 측정될 수 있다. ㅡ 《선악의 저편》 39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101) [8]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9] "불리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는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특히 생리학적 의미에서. 유럽에서 가장 건강하지 않은 종류의 인간이 이 허무주의의 토양이다. 그는 영원회귀에 대한 믿음을 저주로 느낄 것이다. 이 저주를 받으면 사람들은 어떤 행위도 주저하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정도로 의미 없고 목표도 없는 모든 것을 소멸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설령 모든 것이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며, 허무주의와 파괴욕의 이 순간도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통찰하면서 일어나는 경련, 맹목적인 분노에 불과하더라도. 이런 위기의 가치는 그것이 깨끗하게 정화해주고, 유사한 요소들을 한데 몰아넣어 서로를 망하게 하며, 반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에게 공동의 과제를 지정해준다는 데 있다. 그것은 또한 이 인간들 가운데 더 약하고 더 불확실한 자들을 드러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건강의 관점에서 힘의 서열이 생겨나도록 자극한다. 명령자를 명령자로, 복종하는 자를 복종하는 자로 인식한다. 물론 모든 기존 사회질서의 바깥에서. ( 프리드리히 니체, 《유고》 #) [10] 인간은 자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명령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적절한 때에 자신을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 시험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임 중 아마도 가장 위험한 게임일지라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 외의 어느 누구도 증인이 되고 재판관이 될 수 없는 그런 시험일지라도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ㅡ 《선악의 저편》 41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104) [11] 『즐거운 학문ㆍ메시나에서의 정원시ㆍ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 칭찬이나 비난에 무관심해지기 외』 안성찬ㆍ홍사현 옮김, 책세상, 니체전집12권, p.500~501 [12] 이 말의 핵심은, 강자가 몰락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몰락해야 된다는 것이지, 다른 의미는 아니었다. 즉, 사회의 엄격한 훈육 과정에서, 명령을 내릴 줄 모르는 나약한 심성을 지닌 약자는 약자로 만족하던가, 만족하지 못한다면 허무주의자로서 몰락해야만 하지, 약자에게 강자의 권리를 주고자 '명령을 내릴 줄 아는' 강자를 몰락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었다. [13] 독재를 미화하지만 파시즘을 미화하지는 않는다. 니체는 '강요'를 싫어한다. 니체는 정치적으로 그 사회의 본능에 의해 만들어진 독재와 권위는 인정하지만, 사회적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독재와 권위는 인정하지 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종족 보존을 위해 수천년간 검증된 사회적 '본능'으로써) 자발적인 복종이 일어날 때 건강한 독재가 되지만, 사회의 '의식적' 강요에 의한 복종이 일어날 때는 단지 데카당한 독재일 따름이다. [14]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74~175 [15] 난쟁이는 니체가 '중력의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삶을 무겁게 만드는 모든 것을 말한다. [16] '과거의 나'를 죽이고 '새롭게 변화된 나'로 웃으며 다시 태어나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과거의 고통을 마주보아야 하기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거부하고 나 자신을 온갖 불행에 내맡기는 선택일 수밖에 없다. [17]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320~321 [18]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405 [19]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632~634 [20] 헤겔은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無)는 같다"고 말했는데, 니체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쉬운 예를 들자면, 그릇은 그 본질이 비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허무하다거나 외롭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담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즉, 따라야할 가치가 사라졌다는 것은, 모든 가치에 대해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을 말한다. [21] 자기 자신의 삶이라는 구경거리는 허무에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자기 자신은 필요할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필요한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삶이 필요하다. 즉, '삶에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말은 순환논증이라는 것이 니체의 지적이다. 그런데 필요에 의한 이 순환논증은, 사실 철학의 제1원리인 '실체(신)'를 증명하는 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악순환의 신) [22] 여기서 악순환이란, 스콜라철학의 자기원인(Causa Sui)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것의 첫번째 원인이 될 수 있으려면 자기가 자기의 원인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 스피노자 참조) 그리고 스콜라철학에서는 모든 것의 첫번째 원인인 이 '실체'를 '신(deus)'이라 부른다. 니체는 영원회귀 하는 '인생 그 자체'가 철학의 제1원리인 '실체', 곧 '신'의 설명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니체의 철학에서 '신'은, '매순간 반복되는 인생'으로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일찍이 『즐거운 학문』에서 신이 죽었으므로 우리 자신이 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우리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영원에 걸쳐서 물릴 줄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da capo)'라고 외치는 것. 이것이 우리 자신이 신(가치의 창조자)이 될 수 있는 필요 조건이고, 신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23]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