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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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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여담

1. 개요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나의 공식은 amor fati다. 그가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전부 영원히. 필연적인 것은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라, ㅡ 모든 이상주의(관념론)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ㅡ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1]
『이 사람을 보라』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라틴어이며, 운명애(運命愛)라고도 칭한다. 영문은 Love of Fate 또는 Love of One's Fate.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자신의 근본 사유라고 인정한 영원회귀 사상의 마지막 '결론'이 아모르파티다.

2. 설명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만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망을 통하여 끊임없이 더 높은 곳을 열망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며, 허무의 권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항상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넘어서고자 하는 열정을 가져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러한 자에게 본능은 앞으로 수행할 과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통해 미리 천천히 성숙시키고, 의지는 의식의 깊은 곳에서 점점 자라나서 명령하기 시작하여 어느 순간 갑작스레 과제와 사명을 요구한다. 즉, 그 자신의 삶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과제와 사명,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운명'이다.

그 과제는 그 자신의 의지를 대표하기 때문에 그 과제를 수행한다는 것은 그가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를 그 과제와 사명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과제와 사명은 그를 말 그대로 '살아있게' 만든다. 그의 삶은 풍요로움으로 넘치며 의지는 상승한다. 당당한 마음으로 모험을 떠나매 고통은 더 이상 두렵지 않고 그에게 긍정적인 자극제가 될 뿐이다.

그런 의지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위대한 건강'이 필요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러기 위해 니체는 영양, 장소, 기후, 휴식 등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들을 살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애의 결의론'이다. 그것은 결코 '남'이 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되겠다는 결의다.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2]이 되는가? 그것은 '다른' 자신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자기 자신을 하나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거리도 되지 못했던 바로 이런 사소한 것들이, 우리들이 이제까지 중요하다고 여겨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이 '위대한 건강'에 있을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과제와 사명을 직시하고 운명을 마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극복할 과제와 사명을 발견할 수 있고 발견할 것이다. 사실, 사명은 저항과 고통 속에서만 더욱 뚜렷해지고 점차 확신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그러한 자, 의욕에 넘치는 자는 일부러 저항과 고통을 찾아 모험을 나선다. 그러한 자가 얼마나 성장할 것인가는 그가 보다 강력한 적수 또는 보다 강력한 문제를 찾아 나서는가 아닌가에서 드러난다. 상대가 나보다 약할 경우 굳이 결투할 필요가 없다. 그의 과제는 단순히 일반적인 저항을 제압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모든 힘과 유연함 그리고 싸움 기술을 쏟아부을 만한 저항을, 즉 자신과 대등한 적수를 제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큼 강한 적에게만 희열을 느낀다. 그에게 고통은 기쁨이 된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이러한 자신의 과제와 사명, 이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과 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과 앞으로 올 모든 것을 필연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다. 자기 자신에게 만큼은 그 사명이야말로 의욕이며, 삶이며, 놀이이며, 구경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의욕에서 나오는 기쁨은 너무나 강력해서 심지어 그의 본능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솟아나오는 힘들의 압도적인 압력으로 인해 그 자신을 신중하게 보호하는 것마저 잊어버린다. 그는 그 자신의 과제를 위해 자신을 탕진하고 자신을 아끼지 않다가 기어코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낸다. 그는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며, 강물이 강둑을 넘어서 흐르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한다. 그것은 일종의 디오니소스적 도취이자 삶과 창조에의 몰입이다. 가장 낯설고 가혹한 삶의 문제들과 직면해 있으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자신의 무궁무진성에 기쁨을 느끼면서 삶의 최고의 전형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하는 생에의 의지, ㅡ 그러한 유형의 인간은 이런 고통스런 운명에 스스로 기쁨의 축복을 내린다.
"나는 나의 말을 했고, 나의 그 말 때문에 부서진다. 그러므로 나의 영원한 운명은 다음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
예고자로서 나는 파멸하고자 한다! 이제 몰락하는 자가 자신에게 축복을 내릴 때가 왔다."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고통스런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타인이 정해놓은 운명에 따라 사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헤쳐나가기로, 자신의 삶이 만들어내는 운명에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의지의 결과를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의지 그 자체'를 사랑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결과니까 후회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지, '그 결과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차라리 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즉, 자신의 힘에의 의지에서 나온 선택을 했다는 이유가 있어야, 그 이후의 필연적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므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운명이니까 받아들여라" 식의 운명론적 체념은 니체의 의도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3]
나는 경건한 배후세계론자들이 자신의 양심에 대고, 참으로 어떤 악의도 거짓도 없이 "세상을 세상 그대로 놔두라. 그것에 맞서 손가락 하나도 들어 올리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거짓되고 악의적인 것은 없는데도.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

3. 여담

  • 국내에선 에픽하이의 노래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후 이 단어 유행이 김연자의 트로트 곡의 인기로 확대되며 2017년 대한민국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많은 유행어가 그렇듯 유행이 지난 뒤로는 잘 사용하지 않으며 'Amor Fati'라는 문구도 심오한 뜻이 다소 곡해되는 경우가 많다. 힘든 일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운명이니까 받아들이고 포기해'라는 굴복의 의미로[5] 'Amor Fati'라는 말을 건네거나, '난 못났으니까 이대로 살아야지'라며 순응의 의미로 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허무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철학 용어라는 점에서, 사용에 유의해야 한다.
  • 니체의 글을 읽다보면 어디서는 운명이라는 '필연'을 인정했다가 다른 곳에서는 그러한 필연과 반대인 '우연'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니체가 운명을 반대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 니체의 생각을 정확히 말하자면, 니체는 '세계 법칙으로서의 필연'은 반대했지만 내가 만들어 온 가치가 나에게 필연으로 여겨질만큼의 확신으로 다가와야 한다는 것에는 찬성했다고 결론낼 수 있다. 즉, 니체가 반대한 운명론은 '남(도덕, 종교, 신 등)이 정해놓은 운명론'을 말하는 것이고, 니체가 옹호하는 운명론은 '내가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을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니체의 생각에 따르면, 세상은 정해진 목적이 없고 모든 것이 우연이지만, 그 우연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나는 그 우연에서 나의 의지가 선택한 부분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나만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그 우연[6]은 필연으로 느껴질만큼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

[1] Meine Formel für die Größe am Menschen ist amor fati: daß man nichts anders haben will, vorwärts nicht, rückwärts nicht, in alle Ewigkeit nicht. Das Notwendige nicht bloß ertragen, noch weniger verhehlen – aller Idealismus ist Verlogenheit vor dem Notwendigen –, sondern es lieben... [2] 니체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신이 이때까지 살아온 삶 자체에서 비롯된 자신에 대한 요구가 있는데, 그 요구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가치를 설정하라고 강요한다. 단지 우리가 모든 위대한 말과 모든 위대한 태도에 현혹되지만 않는다면, 조직하고 지배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본능(이념)'이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 점점 자라나서 명령하기 시작하며, 우리가 옆길과 잘못된 길에서 되돌아오도록 서서히 인도한다. 그 본능은 어떤 지배적인 과제, 즉 '목표', '목적', '의미'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도 전에, 미리 그것에 봉사하는 모든 능력들이 차례로 형성되도록 준비한다. 그래서 모든 능력이 성숙되고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그 순간에, 그 자신의 삶 자체에서 비롯되는 사명이 갑작스레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써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3] 주의해야할 점은 이 사랑이 기독교가 강조하는 '타인에 대한 사랑'(동정과 연민)을 비판하는 것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 비판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기주의적인 욕망을 합리화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니체의 의도는 단지 위버멘쉬가 되려고 노력하는 자기사랑이, 이웃사랑(동정과 연민)보다도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타인의 평가'에만 신경쓰기 때문에 보여주는 '타인에 대한 사랑'은 위선에 불과할 뿐이라는게 니체의 지적이다. 반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남의 평판에 신경쓰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동정과 연민은 순수하다. 즉, 위선적이지 않다. 그래서 니체는 타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4]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418 [5] 사실 이런 경우는 "VAE VICTIS(패자는 비애뿐)"이 더 적합하지만. [6] 정확히는 '그 우연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해야 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