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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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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珧
? ~ 291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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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서진의 관료이며 는 문거(文琚)로 사마염의 부인인 무도황후 양지의 숙부이자 양병, 양준의 동생, 양제의 형, 양수와는 친척. 사례 홍농군 화음현 출신.

2. 생애

상서령, 위장군을 지냈고 본래부터 명성이 있어 무제의 총애를 받았고 당시의 명망이 양준보다 앞섰으며, 형의 존귀함이 큰 것을 보고 권세, 총애는 거할 수 없는 것을 알아 스스로 사직하려 했지만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진군장군을 지내다가 276년에 조카인 무도황후 양지가 황후가 되자 한 집안에서 두 명의 황후가 나오면 그 종족이 온전하게 된 일이 없었다는 이유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화를 면할 수 있게 해달라고 표문을 올렸다. 우도독 조휴가 왕망의 형제들에 대한 사례로 양씨 형제들에 빗대어 하늘에서 변고가 나타났다는 상소를 하니 양요는 더욱 두려워 사직을 청해서 받아들여져 100만의 돈과 비단 5천 필을 하사받았다.

형인 양준, 동생인 양제와 함께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그 권력이 대단해 당시 삼양(三楊)이라 불릴 정도였다.

277년에 황실의 친척들은 나라를 방어하는 성의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여러 장수들이 변방에 있으니 황실의 친척들에게 그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상주했으며, 279년에는 왕제 유연에게 동남의 일을 맡겨야 한다고 하자 공순과 함께 유연은 그 재주와 그릇은 뛰어나지만 중요한 임무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상주했다.

마륭 양주 선비족을 평정하는 공을 세울 때 조정에서 마륭과 그 군사들에게 벼슬을 줄 것을 논했지만 벼슬이 내려지지 않았는데, 이 당시 양요는 위장군을 지내면서 이들에게 벼슬을 줄 것을 청했다.

붕당을 규합해 사마유를 수도에서 쫓아냈고 이로 인해 양수, 성찬 등이 모의해 양요를 죽이려 했는데, 양요는 이를 알고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관리에게 양수를 탄핵하도록 상주해 태복으로 옮기게 했으며, 이로 인해 조정에서 그에게 반항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아름다운 평론도 없어졌다.

양요는 형벌에 대해 원한을 토로하면서 일이 모두 석함에 있어 장화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해서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심리를 제대로 해 종육의 사례에 맞도록 해야 한다고 여겼다.

291년 맹관 등에게 붙잡히면서 양제, 장소, 이빈, 단광, 유예, 무무, 양막, 장준, 문앙 등과 붙잡히면서 울부짖기를 그치지 않다가 참수되어 삼족이 멸해졌다. 가씨의 족당들은 양씨 집안을 원수처럼 여겼고 이로 인해 형을 집행하는 자를 재촉해 참수했는데, 당시의 사람들 중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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