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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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권 「목종기(穆宗紀)」 | 8·9권 「경종기(景宗紀)」 | 10·11·12·13·14·15·16·17권 「성종기(成宗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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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20권 「흥종기(興宗紀)」 | 21·22·23·24·25·26권 「도종기(道宗紀)」 | 27·28·29·30권 「천조제기(天祚帝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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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권 ~ 62권은 志에 해당. 63권 ~ 70권은 表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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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耶律休哥, ?~998요나라 최강의 명장.[1] 자는 손녕(遜寧)[2]. 북송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2. 생애
2.1. 고량하 전투
어릴 적부터 공보의 그릇을 가지고 있었다. 요 목종 때 우구, 실위 2부가 요나라에 반란을 일으켰고, 야율휴가는 북부의 재상 소간을 따라 이를 토벌하였다. 968년 척은으로 승진하였다.979년 북송이 요를 공격하기 시작하자[3] 북원대왕 야율해저와 통군사 소토구 등이 패하고 남경이 포위되었다. 요 경종은 야율휴가에게 오원군을 이끌고 구원하러 가라고 명하고, 태종 조광의와 친히 대동하였다. 송군은 수수강에서 조우했다. 야율휴가와 야율사진이 좌우로 나뉘어 송군을 공격했는데, 북송군이 대패했고, 요군은 승승장구하며 30여 리의 적을 추격했고, 송병 만여 명을 참수했고, 야율휴가는 세 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다음날 아침 조광의가 남쪽으로 도망치자 야율휴가는 부상으로 말을 타지 못하고 가벼운 수레를 타고 군사들을 이끌고 탁주까지 쫓아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갔다.[4]
2.2. 한번의 전투로 왕에 봉해지다
979년 겨울, 요 경종 야율현은 한광사, 야율사로 하여금 지난번 송군이 남경[5]을 포위했던 원수를 갚으라고 명하였다. 야율휴가는 본부병들을 이끌고 한광사 등을 따라 만성(滿城)[6]으로 진격했다. 공격한 지 하루 만에 다음날 다시 싸우려 하고 송에 항복하라고 칭하였다. 북송군이 항복하려 하고 한광사가 이를 믿자 야율휴가는 이를 만류했으나 한광사가 듣지 않자 야율휴가는 군사를 이끌고 높은 곳에 올라서서 바라보다가 이윽고 송군이 대거 와서 북을 치며 쏜살같이 달려왔다. 한광사는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요나라 사졸들도 기를 버리고 도망쳐 패전했다. 야율휴가가 군대를 수습하고 진격하자 송군은 퇴각했다. 경종 야율경은 이를 알고 야율휴가에게 남면을 지키고 북원대왕을 맡으라고 명령했다.2.3. 와교관 전투
980년 요 경종 야율현을 따라 송나라에 친정하여 군대를 이끌고 와교관을 포위하자, 송군이 구원하러 왔고, 와교관을 지키는 장사가 포위를 뚫고 나왔고, 요 경종이 직접 독전하였으며 야율휴가가 출전하여 장사를 죽이고 와교관의 남은 병사들은 도망쳐 성으로 들어갔다.[7] 송군의 원병은 와교관 외곽에 도착해 남역수 남쪽에 진을 쳤다. 전쟁을 앞둔 요 경종은 야율휴가가 오유창급감을 입고 황색의 오추마를 타고 있으며 손에 용담양은창을 들고 있는 걸 보았다. 요경종이 이를 보고 놀라 야율휴가에게 간곡히 청하였다.장군의 이런 모습은 너무 쉽게 적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 가련한 부마를 못 보셨습니까.
야율휴가가 가가대소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폐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은 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폐하께서는 그저 구경만 하시면 되옵니다.
야율휴가는 수천명의 정예 철기병을 거느리고 일거에 수만명의 송군을 궤멸시켜 북송군을 막주까지 패퇴시켰다. 그 이후 우월[8]로 임명된다.2.4. 기구관 전투
야율문수노가 요 성종으로 즉위하고 태후 소작이 칭제하자, 야율휴가로 하여금 남쪽의 군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야율휴가는 수병을 가지런히 하고 경휴법을 제정하였으며 농업과 양잠을 겸한 뒤 무비를 겸비해 변경은 잘 다스려졌다.986년 북송군이 다시 요나라를 토벌할 때, 범밀과 양업은 운주에서 나왔고, 조빈과 미신은 웅주와 역주에서 나와 기, 탁주를 탈취하고 고안을 함락하고 둔소를 설치했다.당시 요나라 북남원, 해부의 병마가 도착하기 전에 야율휴가의 병력이 너무 적어서 감히 출전할 수 없었다. 그는 밤에 두 군사를 거느리고 경마로 나오며 송군의 단약자를 살상해 여중을 위협하고, 낮에는 정예병을 이끌고 허세로 적을 방어에 급급하게 만들어 피로하게 했다. 숲과 초야에 매복하여 양도를 끊고 조빈 등은 식량 운송이 계속되지 않아 후퇴하여 백구를 지켰다. 한 달여 뒤 조빈은 다시 부대를 이끌고 공격했다. 야율휴가는 적은 군사로 접근하여, 적이 일찍 일어나 멍석 위에서 음식을 먹는 틈을 타서, 무리를 떠나 홀로 나온 사람을 공격하고, 싸우다가 물러났다.그래서 송군은 자구할 겨를도 없이 방진을 결성하여 양쪽에 해자를 파고 전진하였다. 병사들은 목이 마르고 우물이 없어 늪에서 물을 길어 여과한 뒤 마셨고, 모두 4일이 걸려 탁주에 도착했다. 소태후가 이름을 듣고 원병을 이끌고 오자, 조빈 등은 비를 맞으며 도망쳤다. 태후는 야율휴가에게 정병을 증원했고, 야율휴가가 군대를 이끌고 송군을 추격했다. 송군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식량 수레를 돌며 스스로를 방어했고, 야율휴가는 그들을 포위했다.밤이 되자 조빈과 미신이 말을 타고 도망쳤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패주했다. 역주 동쪽까지 쫓아와 송군이 몇 만 명이 더 있는지 알아냈고, 모래 강가에서 밥을 짓고 있었고, 급히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러 갔다. 송군은 먼지가 날리는 것을 보고 도망을 치지 못하고 해안에서 물에 빠졌고, 죽은 사람을 서로 절반 이상 밟아 사하가 흐르지 않았다. 소태후는 회군한 뒤, 야율휴가가 송군의 시체를 모아 경관을 쌓았고, 그는 공로로 송국왕에 봉해졌다. 야율휴가가 송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 황하를 경계로 땅을 약탈할 수 있다고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86년 겨울, 태후 소작이 야율휴가로 하여금 남쪽의 정벌을 담당하게 했고 야율휴가는 선봉에 서서 송나라 군대를 망도에서 패배시켰다. 당시 송나라 장수 유정은 수만 기병 연해로를 출병시켜 이경원과 합병을 약속하고 연밭을 공략하겠다고 큰소리쳤다.야율휴가가 이를 알아채고 먼저 군대를 보내 전략적 요충지를 지켰고 소태후가 군사를 이끌고 도착하자, 야율휴가는 송군과 교전하여 이경원을 죽였다. 이경원이 죽자 유정양은 영주로 후퇴했다.
2.5. 서하 전투
989년 7월, 송나라 위로군[9]의 식량 공급이 이어지지 않자 요나라는 은밀히 침공을 의논했다.이를 들은 조광의는 이계륭을 보내 진주와 정주의 군사 1만여 명을 징발하고 군용 물자 수천 수레를 위로군으로 호송했다.야율휴가가 정찰을 하던 중 이 사실을 알고 수만 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길에서 요격하려고 했다. 송나라 장수 윤계륜이 마침 군사를 이끌고 순찰을 돌다가 야율휴가와 마주쳤고, 야율휴가는 대군을 재촉하여 윤계륜의 군대를 지나 보지도 않고 떠나게 되었다. 윤계륜은 화가 나서 군인들에게 말을 배불리 먹이고 밤을 기다리라고 명령했고, 북송군 모두 짧은 병기를 들고 조용히 요군의 뒤를 따라 수십 리를 걸어 당하와 서하 일대에 이르렀다. 날이 밝기도 전에, 요군은 송나라 대군으로부터 4~5리 떨어져 있었고, 마침 식사를 마친 후 전투를 앞두고 있었고, 이계륭은 방진을 배치하여 적을 기다렸고, 윤계륜은 뒤에서 빠르게 진격하여 요군의 피실 장수 한 명을 죽이고 요군은 놀라서 도망쳤다. 야율휴가는 밥을 먹고 있었는데, 짧은 병기에 팔을 맞아서 많이 다쳐서 말을 타고 먼저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요군은 크게 패하고 서로를 짓밟아 죽은 사람은 무수히 많았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철수하였다.이후 야율휴가는 연의 백성이 곤궁하여 성세를 줄이고 부역을 감세하여 고아와 홀어머니를 구휼하였고 수비병들로 하여금 북송의 경계를 침범하지 말게 하였으며 말과 소가 북으로 달려오더와도 모두 돌려보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귀화하는 이들이 많았고, 이로 인해 변방은 평안해졌다.
998년 사망하였고, 요 성종 야율문수노는 그를 위해 남경에 사당을 세우라는 조서를 내렸다.
3. 기타
북송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요나라의 맹장이었고, 북송에서 아이가 우는 걸 그치려고 했을 때 이렿게 외쳤다고 한다.우월이 이르렀다!
조위의 오자양장 중 하나인 장료와 비슷한 면이 있다. 장료가 800명의 군대로 손권의 10만 군대를 물리치는 등 손오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자, 손오에서 아이의 울음을 달랠 때 "장료가 온다!"라고 외쳤던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