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9:45:09

알트마르크(수송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tmark_schiff_norwegen_joessingfjord.jpg
1. 개요2. 알트마르크 나포3. 나포 이후

1. 개요

알트마르크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 해군의 습격함들에게 탄약과 식량, 연료 등 물자를 공급해주고 포로를 인수하던 위장보급선이었다.

2. 알트마르크 나포

하인리히 다우 함장이 지휘하는 알트마르크는 남대서양에서 어드미럴 그라프 슈페 호를 도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알트마르크 호는 그라프 슈페가 격침한 배들의 승무원들을 수용했고, 그라프 슈페 호가 우루과이 근처의 라 플라타강에서 영국 순양함 3대에 의해 큰 손상을 입은 후 아르헨티나에서 선원들에 의해 자침한 후에는 영국군 포로 299명을 싣고 다시 독일로 돌아간다. 다만 영국 해협을 통과해서 독일로 올 수 없으니, 노르웨이 해안을 통해 독일로 돌아오려 했다. 1940년 2월 14일, 노르웨이 영해에서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알트마르크는 영국 정찰기에 의해 발견되었고, HMS 코사크에 의해 쫓기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HMS-Cossack-returns-to-Leith-17-February-1940.jpg
HMS 코사크
1940년 2월 16일, 노르웨이 외싱피요르드에서 노르웨이 해군의 포격을 받았고, 알트마르크는 코사크에서 사절을 받았다. 회담 후, 코사크로부터 도망가려던 알트마르크 호는 발각되어 선원 7명이 사살당했고, 설상가상으로 암초에 걸렸다. 영국군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 행동 때문에 화나서 결국 돌아가지 않았다. 분노한 영국 해군은 노르웨이 영해 내에서 알트마르크를 공격하여 나포하고 포로들을 되찾았다. 이 싸움은 영국 해군 최후의 등선육박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노르웨이 경비정은 이를 보면서도 역시 막지 않았다.

이 싸움으로 영국 측은 1명이 부상당한데 비해 독일 측은 무려 8명 사망 10명 부상이라는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독일 측은 이 사건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영국 측의 전쟁범죄를 강조하는 식의 변론으로 써먹으려고 했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 독일 모두 노르웨이를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려면 자기가 점령해야겠다고 결정하면서 노르웨이 침공으로 이어지게 된다.

3. 나포 이후

어찌 되었든, 알트마르크는 1940년 8월 6일에 우커마르크라고 재명명되었으며, 수송선으로의 역할을 계속했다.

1942년 9월 9일, 우커마르크는 일본으로 항해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운반해오던 가솔린이 폭발해 53명의 승무원과 함께 침몰했다. 나머지 승무원 365명도 다른 배를 타고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가던 도중 U-43 공격으로 모두 사망했다.

또한 알트마르크 나포 사건의 또다른 주역인 HMS 코사크 역시 1941년 10월 23일 7형 유보트 U-563의 뇌격을 받고 중파의 피해를 입은 뒤, 예인선에 의하여 지브롤터로 예인되던 도중 악천후로 인하여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결국 가라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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